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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가 승리한 세계에서 피해자가 던지는 질문

<침묵의 시선>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

2013년 세계 최고의 영화들이 언급되는 자리마다 빠지지 않던 영화 한편이 있다. 조슈아 오펜하이머라는 신예감독이 연출한 장편 데뷔작인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이다. 1965년 쿠데타로 집권한 인도네시아 군부정권이 공산주의자를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벌인 대학살, 그 현장에 참여했던 가해자들이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을 요란하고도 섬뜩하게 그려낸 영화다. 가해자들은 지금까지도 세력을 잡고 있으며 심지어 과거 잔인한 학살 행위를 무용담 늘어놓듯이 자랑하며 스스로를 주인공 삼아 영화제작까지 한다. <액트 오브 킬링>이 대대적 관심을 얻는 가운데 오펜하이머는 발빠르게 후속작 <침묵의 시선>을 완성했고 2014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이번에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주요 인물이다. 대학살로 형을 잃은 ‘아디’라는 인물이 그의 형 ‘람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가해자들을 차례로 만나러 다닌다는 내용으로 <액트 오브 킬링>과는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다. 조슈아 오펜하이머를 만난다는 것, 그건 최근 1~2년 사이 전세계 영화계의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신예를 만난다는 뜻이 될 것이다.

-당신이 인도네시아 학살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오래된 일이다. 2001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지역의 일군의 여성 노동자들이 조합을 결성한다고 해서 그 과정을 다큐로 만들기 위해 그곳에 갔다. 벨기에 회사가 운영하는 농장이었는데 제초제의 독성에 노출된 노동자들이 그 어떤 보호 장비도 없이 일하고 있어서 중독으로 40대에 사망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보호 장비라도 달라고 신청하면 회사는 ‘판차실라 청년회’라는 북수마트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불법 자경단체이자 극우단체를 고용하여 여성들을 공개적으로 협박하고 폭행했다. 조사 과정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여성 노동자들의 부모나 친척이 이미 판차실라 청년회 등과 같은 세력들에 수없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 그런데 그 세력들이 바로 1965년 대학살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지금까지 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등. 그런 사실들을 알고 나서 그 가해자들을 주인공 삼아 <액트 오브 킬링>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왜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를 중심으로 찍어야겠다는 판단을 했나. =농장의 노동자들이 대개는 대학살 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거나 당시의 생존자들이었다. 2003년에 내가 영화 촬영을 위해 인도네시아를 다시 찾았을 때 그들은 그사이에 이미 협박을 받아 영화 출연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 영화에 출연할 수는 없지만 당신이 저 가해자들을 찍을 수는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왜 그들이 우리 가족들을 죽였는지 알리게 되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가해자들을 만나는 게 두려웠다. 그런데 만나고 나서 너무 놀란 게 그들이 하나같이 자신이 한 일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이었다. 끔찍하게도 자신들의 가족 앞에서 자신들이 사람을 어떻게 죽였는지 시범까지 보여주면서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내게 재현하는 데에도 정말 적극적이었으며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다. 상상해보자.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지 40여년이 지나 독일에 갔더니 나치가 정권을 잡고 있는 모양새를 말이다. 그걸 보고 나서 몇년이 걸려도 이 영화를 꼭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반면에 이번 영화 <침묵의 시선>에서는 피해자 가족을 중심에 두었다. 주인공 아디와 그의 가족은 어떻게 알게 됐나. =내가 아디를 알게 된 건 벌써 11년 전이다. 내가 농장에 처음 갔을 때 농장 노동자들뿐 아니라 주변 마을 사람들까지 하나같이 말했던 대학살 당시의 학살 피해자가 아디의 형 람리였다. 목격자가 없었던 다른 학살에 비해 람리는 그가 울부짖고 고문당하는 것을 본 목격자도 있었고 게다가 가까운 농장에서 시체가 발견되기까지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정한 학살은 없었다는 정부의 발표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자기들끼리 늘 람리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람리에 대해 잊지 않고 말한다는 건 그들에게 일종의 저항적 행위였다. 사실 람리의 동생 아디는 대학살 이후에 태어났지만 모두가 공개적으로는 침묵 속에 살면서 혹은 그 자신이 핍박을 받고 살면서 당연히 질문들을 많이 갖게 된 거다. 나는, 우리 가족은, 우리 마을은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아디는 대답을 원했고 영화를 통해 답을 얻을 거라고 기대했고 그래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아디는 영화 안에서 자신의 구체적인 신분을 밝히기를 두려워한다. 밝혀지면 신변에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영화가 개봉된 이후, 아디는 영화에 출연한 것 자체로 벌써 신변이 위험해진 것은 아닌가. =그렇진 않다. 촬영하는 6개월 동안 아디와 그 가족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나는 가해자들로부터 그들이 협박받지 않도록 노력했다. 촬영이 끝난 뒤에는 인권단체 등과 협력하여 아디와 가족들의 안전을 생각해 아예 북수마트라 바깥으로 이주까지 시켰다. 아디를 위협할 만한 세력들은 북수마트라쪽에 집중적으로 국한되어 있어 그 바깥으로 벗어나면 안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액트 오브 킬링>을 보면 인도네시아 전역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가해자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침묵의 시선>에 등장하지 않고 아디와도 실질적으로 관계가 없으므로 아디에게 위협을 가하진 않았다.

-당신이 인터뷰어로 나서는 대신 아디를 인터뷰어로 기용했다. =나는 아디를 인터뷰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한 피해자의 동생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물어보고 싶은 걸 묻고 그가 힘든 만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을 아디가 대신해준 것이 아니다. 아디는 자신이 알고 싶었던 것을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일부 장면에서는 오히려 나와 생각이 달라서 의견 충돌이 일어난 적도 있다. 예를 들면 영화 후반부에 람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가해자와 그들 가족이 나오는데 그들은 람리의 죽음에 책임이 없는 것처럼 말한다. 아디는 너무 실망한 나머지 그런 그들에게 더이상 할 말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 화가 나서 학살의 증거가 되는 자료들을 그들에게 계속 보여주며 다그쳤다. 내 생각에 인터뷰란 목적을 갖고 상대방이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는 일이 되겠지만 아디는 그들에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순수한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아디는 가해자의 시력을 체크해주고 시력 체크용 간이 안경을 씌워가며 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그것이 마침내 이 영화의 포스터 이미지가 되었으며 영화 속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사실 실용적인 이유가 먼저 있다. 아디의 실제 직업이 안경사다. 자신을 찾아오지 못하는 이들을 직접 찾아가 시력을 체크해주고 안경을 맞춰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 대부분이 노인이다. 노인들의 시력을 체크해주면서 학살 기억을 묻는 거다. 원래 직업을 이용하여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다. 그들이 경계를 늦출 거라고도 생각했고. 왜 일반적으로 치과나 이발소 등에 가면 손님은 자기 권력을 포기하고 의사나 이발사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경우들이 있지 않나. 게다가 시력검사를 하다보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시간을 늘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시력검사 자체가 강력한 은유가 될 것도 같았다. 가해자들은 자발적으로 학살을 외면한, 그러니까 보지 않겠다고 한 사람들 아닌가. 그들에게 아디가 똑똑히 볼 것을 요구하는 은유적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 것이다.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은 유사한 주제를 다루지만 분위기 면에서 크게 다르다. <액트 오브 킬링>이 요란하다면 <침묵의 시선>은 고요하다. =<액트 오브 킬링>은 가해자가 승자일 때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액트 오브 킬링>은 탈피주의, 죄책감, 윤리의 부재 등을 보여주고 있다. <액트 오브 킬링>은 과장된 것에서 끔찍한 것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넓다. <침묵의 시선>의 경우, 가해자가 아직까지 정권을 쥔 상태일 때 그 공포 속에서 침묵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감당할 수도, 치료할 수도, 애도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대한 것이다. 침묵에 관한, 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관한 정적이고 압축적인 영화다. 하지만 겉으로 침묵하는 것처럼 보일 뿐 밑으로 들어가면 내뱉지 못하고 들끓고 있는 많은 것들이 또 있다. 두 작품은 서로를 보완한다.

-다큐의 대가들인 베르너 헤어초크, 에롤 모리스가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의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있다. =에롤 모리스에게 <액트 오브 킬링>의 러프컷 몇 장면을 보여주었을 때 그가 아주 좋아했고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지지해줬다. 베르너 헤어초크는 소개받아 알게 됐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

-무리한 질문이라는 걸 알지만 해보자. 다큐를 만들면서 당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다큐 감독은 자신을 스토리텔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탐험가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지니고 가장 좋은 질문과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많은 이들이 나보고 똑똑하다고 하는데 나는 똑똑한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질문을 열심히 한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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