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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의 비밀이 이 노트에 있다

<장식> 안토니 가우디 지음 / 이병기 옮김 / 아키트윈즈 펴냄

가우디는 1852년 6월25일 타라고나 지방의 소도시, 레우스에서 태어났다. 세례증서에 기록된 그의 이름은 안토니 플라시드 기옘 가우디 이 코르넷(Antoni Pla‵ cid Guillem Gaudi′ i Cornet′) 으로, 그는 가우디 집안의 다섯째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둘째와 셋째 형제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사망했고, 1876년에는 어머니와 형, 1879년에는 어머니 대신 그를 보살피던 이모와 큰누나가 세상을 떠나, 대학을 갓 졸업한 가우디에게 남은 식구는 나이든 아버지(66)와 어린 조카 로사(3)뿐이었다. 1912년 유일한 혈육인 로사가 사망하면서 그는 홀로 남겨졌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의 집안은 대를 이어온 대장장이였고, 어려서부터 가업을 익힌 가우디는 모든 종류의 공작에 능했다. 그는 금속으로 볼륨을 형성하는 대장 작업이 자신의 건축에 상당한 영감을 주었노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장식>이라는 책은 1878년 가우디가 직접 쓴 노트를 엮어 만들어졌다. 그는 1881년에 발행된 신문기사 한편 외에는 공개적으로 글을 쓴 적이 없었다. 그의 생각이 글로 기록된 것은 그가 7년간 소중히 기록한 이 노트 한권뿐이다. 표제가 붙지 않은 이 노트는 그의 고향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하여 ‘레우스의 수기’라고 불린다. 가우디 연구에 있어 1878년과 1910년은 특별하다. 1910년에는 파리 보자르미술협회에서 가우디의 첫 번째 전시회가 개최되면서 그의 방대한 건축 자료들이 취합되었고, 1878년에는 보다 드라마틱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풋내기 건축가와 구엘 백작과의 만남

가우디는 1878년까지 바르셀로나 보병여단에서 병역을 수행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상당기간을 정상복무하지 못했고, 그 덕에 학업을 병행하여 1878년 초 졸업 설계를 제출한다. 그가 형편없는 성적으로 건축과를 간신히 졸업한 에피소드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1878년 3월15일, 드디어 건축사 자격을 취득한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의 구도심, 유대인이 모여 살던 동네 입구에 생애 처음으로 사무실을 갖게 되었고, 가까운 에우달드 푼티의 공방에서 오는 5월 개최될 파리 만국박람회에 보내려는 에스테베 코메야스의 장갑 진열대를 제작했다. 건축과를 졸업한지 한달 남짓이니 아마 이 진열대는 가우디가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은 첫 작품이었을 것이다. 에우세비구엘 백작은 당시 스페인의 벨벳 생산을 독점하던 중요한 직물공장의 소유주로서, 새로운 생산기계와 생산품에 대한 관심으로 그 박람회장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가우디가 만든 진열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막대한 재력과 영향력을 가진 구엘 백작이 가우디를 수소문하여 찾아왔고, 그는 가우디에게 자신의 장인 안토니오 로페스 후작을 위한 가구 제작을 청했다. 구엘의 장인으로 언급되는 안토니오 로페스는 그해 후작 지위에 올랐고, 불과 3년 후면 스페인 귀족 서열 중 가장 높은 지위인 ‘그란 데 에스파냐’에 오르게 되는 인물이다. 대학을 졸업한 지 채 두달도 되지 않은 풋내기 건축가. 구엘 백작은 그에게 이 왕국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을 위한 가구를 맡겼고, 이후 그에게 10개가 넘는 프로젝트를 맡기며 무한한 신뢰를 유지했다. 그들이 극적으로 만난 1878년 여름, 이 책 <장식>이 쓰였다. 주지할 만한 사실은 가우디가 구엘을 찾은 것이 아니라, 구엘이 가우디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가우디의 진열대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어쩌면 그 답은 이 노트에 있다.

당시 스페인에는 ‘인디아노’(el indiano)라 불리는 사회계층이 급부상했다. 인도라고 생각했던 그 기회의 땅에서 그들은 대단한 부를 얻어 돌아왔다. 그들 중 대부분은 본디 상류층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 귀족 자제들은 정치를 배웠지 장사를 하진 않았다. 막대한 부를 통해 지역사회의 중심에 서게 된 이들은 사업가 특유의 유연한 사고를 가졌고, 기존의 귀족 문화에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시대의 역동성을 통해 지금의 지위에 오른 그들은 새로운 것과 변화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구엘 백작의 아버지와 장인이 바로 이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바트요 주택의 다락방.

단순한 양식, 좋은 구조

가우디는 여러 역사양식을 모방하는 절충주의 건축 교육을 받았지만 당시는 이미 고전에 대한 의심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카탈루냐 지역에서는 자연주의 건축이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가우디의 건축을 장식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의 건축은 자연주의를 표방한 동시대 건축물에 비하면 장식이 상당히 절제된 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양식을 모방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과도한 장식을 갖게 하며, 단순한 양식은 좋은 구조를 가진다. 미학적 구조는 다양한 자원과 풍성한 해법으로 그 건축을 해명하며, 그 자체로 대상을 만족스럽게 만든다.” 말하자면 그 대상이 하나의 실체가 되는 것이다. 언제나 예술은 새로운 존재이길 꿈꾼다. 하지만 기존의 양식을 모방하면서 다른 무엇을 이루고자 한다면 더 많은 장식을 갖게 될 뿐이다. 그리고 이와 비교되는 것은 ‘단순한 양식’이다. 가우디가 설계한 밀라 주택의 잔잔하게 파동치는 입면이나, 성가족성당에서 사용된 구조체, 바트요 주택의 다락방, 산타 테레사 학교의 복도에서는 고전 건축이 강제하던 장식요소들이 상당 부분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가우디는 이런 단순한 양식을 통해 그것이 품은 구상을 간명하게 드러낸다. 가우디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갖는 특성을 ‘색채와 운동’이라고 꼽았는데, 이는 ‘추상화된 차가운 백색과 굳건한 안정감을 추구하는 고전주의 건축’과는 반대편에 서 있다. 가우디의 건축은 역동성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런 가치는 역동적인 변화를 체험한 당대의 사회와 잘 어울린다. 세계 문화유산인 가우디의 일곱 건축물 중 성가족성당을 뺀 나머지 여섯은 앞서 언급한 신흥계급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민중봉기의 한복판에서

<카탈로니아 찬가> 조지 오웰 지음 / 정영목 옮김 / 민음사 펴냄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과 <1984년>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소설가로, 스페인 내전에 공화국의용군으로 참전하여 이 책을 썼다. 내전은 가우디가 사망하고 10년이나 지나서 일어났지만, 소설이 그려내는 여러 집단간의 갈등은 이미 오래된 것이었다. 이 책은 당시 스페인과 카탈루냐를 재치 있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런 사회적 갈등은 구엘로 하여금 도심의 공장단지를 교외로 옮기는 ‘구엘의 공장단지’ 프로젝트를 관통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예술을 이끌던 산업자본가들이 맞닥뜨리는 또 다른 상황이다. 1909년 바르셀로나에서는 ‘비극적인 주간’ (Semana Tragica)이라 불리는 민중봉기가 있었는데, 구엘 백작은 80여개의 종교 건물을 포함한 112개의 건물이 불타고, 78명의 사망자를 낸 이 민중봉기의 한복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