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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알코올맥주에 취한 시대를 위무하는 마틴 스코시즈의 해장술
2014-10-07

김수의 이론비평 요약

<셔터 아일랜드>

3D가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을 확신하며 조르주 멜리에스를 낭만적으로 소환한 <휴고>(2011)와 몇몇 다큐멘터리를 제외하면, 공교롭게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함께한 마틴 스코시즈의 근작 세편은 모두 본질과 허상의 괴리가 파생하는 긴장을 담고 있다. <디파티드>(2006)는 갱단에 위장 잠입한 경찰이 정체성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누아르이고 <셔터 아일랜드>(2010)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내면 탐방기를 스릴러로 풀어낸 작품이다. 두 영화에서, 자아를 잃은 주인공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끝없는 투쟁을 벌인다. 부재와의 투쟁은 애초에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이다. 허상을 적으로 상정한 캐릭터의 서사는 패배로 끝날 수밖에 없다. 스코시즈는 장르적 쾌감에 한껏 공을 들여 관객을 몰입시킨 후, 캐릭터의 패배를 고스란히 함께 맛보게 한다. 동일시를 통한 열패감의 전달은, 개인의 희생을 종용하는 사회 시스템에선 누구나 실패의 가능성을 짊어졌음을 깨닫게 한다.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 이하 <더 울프>)는 이런 긴장의 계보에서 한발 벗어나 있다. 이전의 두 작품이 서사와 주제가 매끄럽게 합치될 수 있게 장르 효과로 보강하는 만듦새였다면, <더 울프>는 완전히 상반된 방식을 택한다. 블랙코미디가 선사하는 장르적 쾌감인 조롱과 희화화는 긴장보단 유희에 더 어울린다. <디파티드>와 <셔터 아일랜드>가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어울리는 장르를 택하여 긴장을 내재화했다면, <더 울프>는 의도적으로 긴장을 배제하는 장르적 선택을 통해 현실과의 접점을 느슨하게 만든다. <더 울프>는 바로 그 지점에서 전복을 꾀한다.

‘술 아닌 술’에 취하는 과정을 좇다

<더 울프>의 후반부, 조던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FBI의 조사를 받으며 감금생활을 하던 중 격려차 방문한 친구 도니 아조프(조나 힐)와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서로에 대한 우정이 아직 변치 않았음을 확인한 조던은 도니에게 무알코올맥주를 권한다. 도니는 ‘무알코올맥주’의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계속 되묻는다. …“그게 뭔데?” “무알코올맥주야. 알코올 없는 맥주.” “이게 맥주라고?” “응. 알코올은 없지만.” “마시면 취하긴 하는 거지?”… 가벼운 만담처럼 흘러가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조소를 짓는 건 쉽다. 하지만 무알코올맥주가 무엇인지 답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무알코올맥주’(non-alcoholic beer)는 ‘둥근 사각형’ 같은 형용모순이다. 도니의 마지막 반문이 ‘무알코올맥주로 취할 가능성’에 대한 타진임은 의미심장하다. 조던과 도니는 모순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스스로 모순적 현상이 되는 길을 택한다. 이처럼 ‘술 아닌 술’이라는 화두는 영화 전체를 아우른다. <더 울프>는 대중이 ‘술 아닌 술’에 취하는 과정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이다.

‘술 아닌 술’은 금융자본주의의 허상을 상징한다. 이러한 의미화는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영화의 첫 장면, 조던의 금융회사 스트래튼 오크먼트의 CF는 “안정성, 진실성, 자부심”을 강조하며 끝난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 조던은 소인증 장애인을 다트 삼아 과녁에 던지고 있다. 건강한 금융회사의 이미지에서 비윤리적 놀이로의 연이은 편집. 허상과 실체는 접붙어 있고, 영화는 거기서 파생되는 모순을 숨기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허상, 실체, 모순의 삼각 구도를 끊임없이 부각하는 게 <더 울프>의 전략이다. 전략을 관철하기 위해 스코시즈는 마약과 섹스라는 소재로 관객을 의도적으로 자극한다. 빠른 전개와 속도감 넘치는 편집은 관객에게 롤러코스터의 흥분을 제공하지만, <더 울프>의 쾌락엔 안전장치가 없다. 조던의 쾌락에 몰입할수록 관객은 주머니가 헐거워지는 동일시의 역설을 체험하게 된다.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현금을 주고 ‘부라는 관념’을 사는 사람들

돈의 흐름을 좇아 월스트리트에 입성한 청년 조던은 수석브로커 마크 한나(매튜 매커너헤이)를 만난다. 그는 주식을 “푸가지”(fugazi)로 정의하며 “요정가루”에 준하는 허상임을 까발린다(마크는 푸가지의 개념을 설명하며 “푸가지, 푸게이지, 위지, 우지… 그게 뭐든”이라며 정확하게 발음조차 못한다. 푸가지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현금[正]-투자[反]-수익[合]’이라는 아주 간단한 변증법적 구조에 브로커가 감언이설을 얹으면 수익(진테제)은 요정가루처럼 사라진다. 수익은 끝없는 재투자로 이어지고 현금(테제)와의 연결고리는 영원히 끊어진다. 고객은 수익을 “진짜로 만들지”(make it real) 못하고 “종이를 보며”(on paper) 부자가 됐다는 착각에 빠진다.

쾌락의 한계치에 도달하여 조던의 육체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순간, 영화는 잠시 블랙코미디의 기조를 버리고 슬랩스틱 코미디로의 전환을 선보인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향정신성 약품 쿠알루드를 다량 복용한 조던이 ‘뇌성마비 단계’가 되어 펼치는 한바탕 소동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인상적인 연기에 힘입어 큰 즐거움을 준다. 발음을 제대로 못하고, 침을 질질 흘리며, 땅바닥을 기는 슬랩스틱의 요소들은 조던의 육체가 쇠하여 돈을 버는 기제로 작동하지 못함을 내포한다. 자신의 몸이 더이상 유물론적 도구로 활용될 수 없음을 깨달은 조던은 은퇴를 결심한다. ‘블랙먼데이’ 이후 조던의 서사가 마무리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온 것이다. 하지만 ‘믿음과 사랑’의 가치가 강조된 은퇴연설을 하며 직원들의 감정을 자극하던 조던은 스스로 모습에 도취하여 은퇴를 번복한다. 이것은 맥도널드에서의 노동을 폄하하고 부자를 찬양하며, 오직 돈의 중요성만을 역설했던 조던의 이전 연설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이후 조던의 서사는 급전직하한다.

스코시즈, ‘모순의 현상학’을 완성하다

조던의 서사를 몰락으로 이끄는 중대한 역할치고 던햄(카일 챈들러)은 비중이 작다. 던햄은 영화에 자주 등장하지도 않고, 장르적 쾌감을 주는 캐릭터로서 기능하지도 않는다(그가 조던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사했는지에 대해 관객은 알 수 없다). 플롯 구성상 미들포인트인 조던과의 첫 만남 전까지 던햄은 짧게 네번 등장하는데, 그는 출근하고 사격연습을 하는 등 묵묵히 수사관으로서의 일을 한다. 던햄은 조던과 다르게 ‘진짜 노동’을 하는 것이다. 던햄의 서사가 영웅주의나 엘리트주의로 묘사되는 것을 경계하는 영화의 태도는, 관객의 시선이 던햄 캐릭터에 머물러야 함을 자연스레 유도한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의가 승리하는 계몽적 결말은 쉽고 편하지만, 상투적인 소모성 선택이다. 시선의 전환이 일어나야 하는 순간, 이어지는 조던의 수감장면은 이런 흐름을 보기 좋게 뒤엎는다. 교도소에 수감된 조던의 고난에 영화는 단 하나의 숏도 할애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도소 안에서 여유롭게 테니스를 하며 법치의 영역을 웃도는 자본의 힘을 술회하는 내레이션을 통해 현실의 부조리를 한번 더 각인시킨다. 심지어 영화는 마지막 내레이션으로 “어떻게 파는지 배우고 싶은가?”라는 조던의 오만한 질문을 택하며 시선의 전환을 끝까지 방해한다.

<더 울프>의 마지막 신은 이런 ‘시선’의 문제에 쐐기를 박으며 끝난다. 조던의 수감으로 서사가 마무리되긴 하지만 그것이 그의 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진 못한다. 금융자본주의가 핵심인 ‘돈의 서사’에서 돈을 잃지 않은 캐릭터가 몰락했다고 단언하긴 머뭇거려진다. 바로 이 지점이 유효한 덕분에 마지막 장면은 모종의 위화감을 형성한다. 출옥 후 세일즈 명사가 되어 뉴질랜드까지 진출하여 강연하는 조던. 그는 강단에 올라 아무 말 없이 청중을 바라본다. 그리고 조용히 내려가 앞줄에 앉은 몇 사람에게 “이 펜을 내게 팔아보세요”라고 말한다. 조던을 잡아넣고도 개운하지 못했던 던햄의 우려는 마지막 숏에서 확증된다. 청중의 시선은 마치 ‘환영’을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이것은 물론 ‘푸가지’의 재림이다. 푸가지는 그 정의처럼 실존하지도 않지만 사라지지도 않는다. ‘노동 없는 부’를 원하는 모순된 욕망의 체계는 금융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런 문제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현실을 인정하는 게 급선무인데, 문제는 그 현실이 모순적 현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현실 세계의 실체적인 위협을 피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모순으로 이뤄졌음을 파악해야 하는 이중고. 이것은 어려운 싸움이다.

<더 울프>는 장르, 소재, 플롯의 선택지에서 지속적인 전위를 시도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을 계속 상기시킨다. 현실의 문제가 어려운 만큼 영화가 그것에 접근하는 방법 역시 쉽진 않다. 스코시즈는 권선징악 픽션을 택하여 대중에게 어설픈 위로를 주지도 않고, 다큐멘터리를 통해 금융손해를 입은 대중의 공분을 이끌어내지도 않는다. 낙관과 절망은 유보한 채, 안전한 정면승부 대신 위험한 우회로를 택하여 미세한 변화를 이끌어내려 한다. 엔딩숏의 환영을 좇는 청중의 시선이 도구적 전경으로 전락할지, 본질적 미장센이 될지는 결국 이 사소한 변화에 달렸다. 영화는 관객이 실체와 허상의 길항작용이 빚어내는 함정에서 벗어나 실존적 가치, 즉 ‘손에 잡히는 것’으로 시선을 돌리길 기원한다. 허상을 실체로 오인하는 현실의 기제를 소환하여 ‘모순의 현상학’을 완성한 <더 울프>. 모순에 휩쓸릴지, 의심을 품을지 선택하는 건 이제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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