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시키지 않는다. 본인은 특별히 잘하는 장르는 없다고 겸양을 보이지만 어떤 장르라도 본인의 색으로 소화해버린다. 적어도 오락영화가 지녀야 할 감에 있어서 이만큼 확실히 믿음이 가는 감독도 드물다. <타짜-신의 손>(이하 <타짜2>)으로 돌아온 강형철 감독은 또 한번 본인의 감각을 증명했다. 젊고 새롭게 태어난 <타짜2>에는 강형철 감독 특유의 인장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강형철의 <타짜2>가 장르의 장벽을 넘나들며 잘 만든 오락영화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을 들어본다.
-2편이 나오기까지 8년이 걸렸다. 전작의 흥행은 물론이고 스타일이 워낙 명확해 부담이 적지 않았을 텐데 <타짜2>의 연출을 결심한 계기가 무엇인가. =딱히 말 못할 우여곡절을 거치진 않았다. 처음 <타짜>를 봤을 때부터 시리즈로 만들어져야 할 영화라고 생각했고 기회가 된다면 그중 한편을 맡아보고 싶었다. <과속스캔들> 끝날 무렵부터 이안나 PD에게 ‘<타짜> 같은 영화 한편 해볼까봐’라고 말해왔다. 그런 얘기가 어떻게 귀에 들어갔는지 싸이더스쪽에서 <타짜> 속편을 만들어보자고 연락이 왔다. 막상 눈앞에 닥치니까 부담은 되더라. 다른 것보다 늘 혼자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는데 원작을 각색해야 한다는 점이 어려웠다. 게다가 다른 작품도 아니고 <타짜> 아닌가. 시나리오에만 꼬박 3년을 공들였다. 그래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한다.
-‘<타짜> 같은 영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영화를 말하는 건지. =누아르, 진한 누아르다. 항상 정통 누아르를 한번쯤 해보고 싶었다. <과속스캔들>과 <써니> 덕분에 어느새 코미디 전문(?) 감독처럼 인식되는 것 같은데 사실 장 피에르 멜빌 영화를 좋아한다. <더티 하리>와 <리쎌 웨폰> 시리즈의 빠른 리듬감도 좋다. <타짜>라는 최고급 재료를 활용해 누아르 장르에 도전해볼 기회가 생긴 거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멋지다’고 하니 최동훈 감독의 전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만들고 싶어도 최동훈 감독님 같은 능력이 없어서 불가능하다. (웃음) 1편의 차진 대사와 멋들어진 상황을 이어나가는 리듬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다. 하지만 1편의 내용이나 분위기, 인물들은 되도록 가져오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 안에서 이미 완벽한 이야기다. 1편보다는 원작의 맛을 최대한 살려보고 싶었다. 최동훈 감독님처럼 새로운 구성으로 재구성할 자신도 없었고. 기댈 수 있는 건 원작뿐이었다. 사실 원작을 워낙 재밌게 봤다.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하기 전에도 족히 10번은 넘게 본 것 같다. 거기에 내가 굳이 뭔가를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겸손이 지나친 거 아닌가. 과감하게 청소년 관람불가로 간 건 그만큼 자신이 있었던 걸로 보이는데. =워낙 방대한 이야기니까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애를 먹었다. <타짜>는 기본적으로 겉멋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실제로 그만큼 도박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도박에 대한 일종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지점이 많다. 그 와중에 겉멋, 허세 같은 것들이 적당히 끼어들어가 부풀려지고. 그런 허세들이 사랑스럽지 않나? 없어도 있어 보이는. 인간적이기도 하고. 기왕지사 원작을 가져올 생각이면 최대한 그 정서와 맛을 살리고 싶었다. 어른들이 즐길 수 있는, 즐겨주길 바라는 오락이다. 애들은 가라? (웃음) 원작의 정체성이 19살 이상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굳이 더 많은 관객을 위해서 그걸 훼손할 생각은 없었다. 나이 들면 또 볼 수 있다. 한번 보고 사라지는 건 왠지 슬프니 지금 못 보는 관객은 나중에 볼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꼭 다시 찾아봐줬으면 좋겠다.
-최승현의 스타파워와 캐스팅은 무관했나. =가수로서 최승현이 얼마나 인기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른다. 나한텐 친한 동네 동생 같은 느낌인데. 엉뚱하고 부실하고. (웃음) 이번 캐스팅은 어디까지나 캐릭터에 맞는 적역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시나리오를 쓰는 중에 저절로 머리 속에 그려진 사람도 있었고 적합한 이미지를 찾기 위해 한참을 뒤진 역할도 있었지만 적어도 원작과 비교했을 때 어울리지 않는 역할은 한명도 없다고 자부한다. 최승현은 일단 눈빛이 좋았다. 한편으론 소년 같고 한편으론 자신감 넘친다. 그러면서도 깊다. 사연이 있는 눈이다. 함께 작업하면서는 의외의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사람이 선하고 예의바르다. 없는 소리 안 하고 가식도 없다. 현장에서 무척 쾌활해 분위기를 살려주면서도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진지해진다. 멋을 두를 줄 아는 친구다.
-초•중반의 속도감은 화려하고 화사한 느낌이다. 1편의 싸늘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속도는 의도적으로 빠르게 할 필요가 있었다. 워낙 방대한 이야기라 듬성듬성 편집하면 감정이 튈 우려가 있었다. 빠른 감정 전달과 몰입을 위해 초•중반엔 몽타주도 적극 사용하고 장면 전환도 과감하게 시도했다. 대길(최승현)의 허영에 대한 판타지가 묻어 있으니까 대길이 승승장구하는 순간은 스타일리시한 톤을 유지하고 싶었다. 화려한 불빛을 쫓는 불나방 같은.
-대길이 도박에 입문하고 상승했다가 몰락하는 속도와 낙차가 어마어마하다. =이야기는 대길의 성장담이라고 볼 수 있지만 영화의 전개는 공간을 따라갔다. 망아지처럼 철없던 시절을 지낸 군산은 시골의 소박함, 작은 판이라는 느낌을 줬다. 이후 서울의 강남 하우스는 허영과 화려함의 상징이다. 편집도 그에 따라 빠르고 경쾌하게 갔다. 동식(곽도원)이 일당에게 털린 후 고광렬(유해진)과 만나는 부산 부둣가는 잿빛의 우울함이 묻어나게, 후반 서울로 다시 돌아와 복수를 기획하는 장면은 케이퍼 무비의 느낌이 나도록. 마지막 아귀(김윤석)가 등장하는 시퀀스는 무시무시한 승부의 세계로. 공간별로 장르가 바뀌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멜로부터 액션, 코믹, 누아르까지 장르로만 보면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장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인물들이 나오고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판이 짜인다. 군산 하우스, 강남 하우스, 유령 하우스, 아귀의 별장까지 분위기를 결정짓는 건 공간이다. 어떤 의미에서 공간이 각 장면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가령 군산 하우스는 농번기가 끝난 창고의 느낌으로 비료 포대가 쌓여 먼지가 폴폴 날린다. 강남 하우스야 대길의 환상을 채워주는 공간인 만큼 화려한 색채고, 변두리 답십리 하우스는 아무리 꾸며놔도 추악함으로 들끓는 도박장의 본질을 슬쩍 보여준다. 미나(신세경)를 구출하기 위해 뛰어드는 유령의 하우스는 입구부터 지옥으로 걸어내려가는 느낌이 나도록 했다. 단순히 겉멋에 그치지 않고 인물의 심리 상황을 좇아가며 감정이랑 맞닿아 있어야 한다. 그걸 표현하는 게 미술이고 미장센이다. 대신 장르가 바뀌면서 튄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전체적으론 대길이란 인물의 성장담을 따라간다.
-콘티 단계부터 꼼꼼한 계산이 필수였겠다. =나는 콘티 없으면 영화 못 찍을 것 같다. 특별히 상황이 없는 한 콘티대로 가는 게 기본이다. 자료조사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닌데 콘티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짜는 편이다. 그게 없으면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라고 봐도 된다. 콘티가 충실하면 작품 전반에 대한 이해가 높아질 뿐만 아니라 각 파트의 막내들까지 구체적인 상황을 그리고 이해할 수 있다. 다들 주어진 역할만 기능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식을 가지고 각 장면에 임할 수 있어 작업 참여의 질이 확 올라간다.
-그림도 잘 그릴 것 같은데. =어릴 땐 굉장히 잘 그렸다, 는 소문이 있는데(웃음)… 지금은 졸라맨 수준이다. 이은호 콘티 작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내가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려버리는, 내 머리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어쩔 땐 더 구체적으로 그려줘서 큰 도움이 됐다.
-원작과 싱크로율이 높은 만큼 캐스팅 과정이 신중했을 텐데, 시나리오 단계부터 이 배우다 하고 염두에 둔 사람이 있다면. =첫 번째는 곽도원. 실생활 같은 리얼함이 있다. 대본을 쓸 때부터 그의 분위기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 동식이란 인물은 또 다른 형태의 사이코패스인데 비현실적으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 동네 슈퍼 아저씨처럼 수더분한 가운데 번뜩이는 살벌함이 있다. 또 한명의 아귀랄까. 박효주는 뒤돌아보는 순간의 날카로운 턱선이 매력적이다. 만화의 한컷을 그대로 따온 것 같다. 이경영 선배님은 내가 뭐라 말할 수 없는 영역에 계신 분이다. 그외에도 역할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함께해준 배우들에게는 감사할 따름이다.
-의외다. 곽도원의 동식이는 원작에서는 가장 거리가 먼 인물 아닌가. =원작에선 화투판의 똥물 같은, 별 매력 없는 악당 중 한명에 불과하지만 악의 주축이 될 인물을 그렇게 그리고 싶진 않았다. 원작의 동식이보다는 곽도원이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이미지에 더 끌렸다. 세고 과장된 표현이 많은 영화인 만큼 사실적으로 눌러줄 배우가 필요했고 그런 의미에서 곽도원 말고는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이었다.
-대길을 사이에 둔 허미나(신세경)와 우 사장(이하늬)의 대결도 눈에 띈다. =허미나 캐릭터는 <비트>의 로미를 닮았다. 수컷들이 판치는 도박판에서 여성스러움과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우 사장은 전형적인 팜므파탈이지만 맹한 구석도 있고 한편으로는 동정이 간다. 매력적인 캐릭터가 된 건 배우의 공이 큰 것 같다. 현장에서도 단순한 악녀가 아니라 모든 행동에 타당한 이유가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악역이 맡은 역할에만 그치는 건 재미없지 않나. 모두 각자 사정이 있고 이유가 있다.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매력으로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주차장에서 미나와 함께 있는 대길이 우 사장에게 뭐라고 속삭인 건가. 우 사장이 미쳐 날뛰는 결정적 대사 같았는데 끝까지 알려주지 않더라. =사실 대사를 쓰다 쓰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생각이 안 나서 그냥 음소거로 가자고 했다. 아마 아귀에게 자신을 소개한 것처럼 “옛날엔 38광땡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쌍년”이라는 느낌의 말 아니었을까. 우 사장이 대길에게 집착하는 건 젊음에 대한 질투가 아닐까 한다. 예전에는 안 넘어가는 남자가 없었는데 이젠 안 통하는 건가 하는 위기의식. 그런 면에서는 대길보다는 미나를 향한 감정에 가깝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음악과 매치시킨 장면이 나온다. 강형철스러운 연출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딱히 의식하는 건 아닌데 습관처럼 그런 순간들이 익숙하다. 어릴 때부터 레코드판을 들으며 음악에 어울리는 장면을 상상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장면이 먼저인지 음악이 먼저인지 모를 때도 많았다. 우 사장이 등장하는 장면의 <Spooky> 같은 경우는 팜므파탈이 등장할 때 그 음악을 꼭 한번 써보고 싶었다. 카체이싱 장면에서 나오는 나미의 <빙글빙글>은 상황에 맞는 유머를 통해 긴장감을 한 템포 풀어버리고 싶어 넣었다. 선호하는 유머도 주로 그런 식인 것 같다. 엉뚱하게 치고 들어와 긴장감을 전환시키는. 심각한 순간을 심각하게만 가는 건 재미없지 않나. 농담인 듯 농담 같지 않은 순간들이 좋다.
-아귀의 제자로 나오는 여진구는 회심의 캐스팅이다. “이놈이 대한민국 도박판을 흔들 놈이여”라니. 3편에 대한 예고인가. =제일 큰 이유는 그냥 내가 여진구를 보고 싶었다. (웃음) 태생이 시리즈인 영화에서 전작과의 연결고리는 필수인데 이번에는 전작에 그런 설정이 없어서 오프닝을 비롯해 중간마다 연결고리를 따로 찍어서 붙여야 했다. 여진구는 다음 작품을 위한 나 나름의 선물이다. <타짜>는 지속 개발 가능한 방대하고 풍부한 이야기니까 꼭 3편이 아니라 프리퀄이나 번외편이라도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었다.
-3편 제의가 들어오면 다시 한번 연출할 생각이 있나. =절대 안 할 거다. 대본 쓰는 게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관객으로서 <타짜> 3편은 보고 싶다. 다음에 만들어주실 감독님, 고생 좀 해보시라.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