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전설>은 데이비드 밴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여러 편의 소설을 모은 한권의 책이기도 한 <자살의 전설>은 십대에 아버지를 잃은 데이비드 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자살한 아버지, 가족 문제가 심각했던 새어머니, 어머니의 가족들, 아버지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차례로 쓴 작가는 지금 이혼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다. 무의식이야말로 소설의 가장 큰 자양분이라는 그는, 가장 가까운 이들의 삶으로부터 무의식의 자양분을 얻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오전에는 집필 때문에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나는 미리 계획을 짜거나 아우트라인을 완성하고 소설을 쓰지 않는다. 그냥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본다. 매일 아침 2시간씩 쓴다.
-2시간씩만 쓰나. =2시간만 쓰고 남은 일과 중에는 소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구성에 대해서든 뭐든. 매일 아침 자연스럽게 글을 써내려갈 뿐이다. 나에게는 쉬운 일이다. 하루에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는 번역을 하는데 고대 영어에서 현대어로, 라틴어에서 현대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들이다. 책을 읽거나 이메일을 확인하기도 한다. 뉴질랜드에 있을 때는 아웃도어 스포츠로 낮시간을 보낸다. 윈드서핑, 수상스키, 마운틴 바이킹, 하이킹….
-<자살의 전설>은 아버지의 자살이라는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반자전적 소설이다. 쓰기 어려운 대목은 없었나. =특별히 어려운 대목이 있다기보다는 10년간 실패를 했을 뿐이다.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 내 감정을 흔드는 굉장히 사적이고 힘겨운 사건이었기 때문에 한 이야기로 정리할 수 없었다. 10년간 여러 작가들의 책을 접하며 결국 다른 스타일로 쓰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 하와이까지 배를 타고 이동하던 어느 날 나는 코맥 매카시와 윌리엄 포크너의 책을 읽었는데 그동안 이 책의 절반에 해당하는 글을 17일간 썼다. 10년간 붙들고 있었으면서도 결국 이 책에 쓰인 대부분의 문장들은 굉장히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쓰인 셈이다. 그리고 수정하지 않았다. 정작 오랫동안 쓴 글들은 다 버렸고.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영원히 바꾸어버렸다. 계획을 짜서 개요를 만들고 여러 번 퇴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빠르게 다가온 것들, 특히 무의식적인 것들을 잡아채서 써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아버지의 자살을 해명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가까운 사람의 자살이라는 사건을겪으면, 그 이유를 간절히 찾게 되는데. =아마도 그래서 오랜 시간이 걸렸던 건 아닐까 싶다. 나는 내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이해할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해답이 없더라. 그가 왜 결국 그런 선택을 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게 답이었다. 그리고 내가 다시 괜찮아지는 일은 없다는 것도 확실했다. 나는 그저 이야기의 무의식적인 변환 과정을 글로 기록할 뿐이었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도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버지의 선택에 대해 30년간 너무나 화가 나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면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마지막 순간에 다른 선택을 했어야 했다고. 그리고 20년간 나는 내가 아버지의 전철을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책을 내고 25개국이 넘는 나라들에서 북투어를 하면서 어디에서나 나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바라기는, 자살에 대한 문화적인 수치심을 덜 느끼게 되길 바란다. 한국은 특히 자살률이 높은 국가 아닌가. 우울증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 우울증에 걸리는 게 아니다. 그리고 나을 수 있다는 것도.
-개인적인 이야기라 극적으로 묘사하고 싶었을 수도 있을 텐데 오히려 감정을 드러내는 대목이 적다. =내가 문예창작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도 하는 이야기다. 대체로 학생들은 스스로를 너무 몰아붙이면서 극적인 장면을 바로 써버리려고 한다. 문제는 독자들이 작가의 감정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독자는 어디선가 시작해서 이 인물들은 누구이고 이곳은 어디인지 알 시간을 필요로 한다. 독자의 감정이 작가의 그것만큼 끓어오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이 책을 쓰는 데 10년이 걸린 것도 그래서였다. 첫해에 나도 그런 실수를 했다. 첫 페이지에서 아버지가 죽은 걸 알게 되면서 시작하자 모든 등장인물이 울고불고 난리였다. 그런 책을 읽고 공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걸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원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다른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 책에서 알래스카의 낚시를 이야기한 건 그래서다. 낚시 이야기가 나오고서야 아버지가 전면에 등장한다. 단편소설을 많이 쓴 미국의 작가 그레이스 페일리는 “모든 좋은 이야기는 두개의 이야기다”라고 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집중할 수 있는 표면적인 이야기가 보여지고 그 아래 다른 이야기가 있다. 독자들은 한 가지 이야기를 읽으며 다른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퇴고를 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처음 구상한 이야기의 굉장한 축약본이라는 느낌이 있는데. =많은 작가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 아닐까 싶은데. (웃음) 대체로 자전적인 이야기의 성격이 강하게 녹아 있는, 자신의 삶의 가장 강렬했던 사건에 대해 쓰게 되는 첫 번째 소설에는 보이는 것 말고 그 뒤에 더 큰 것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보여지는 것 아래에 거대한 빙하가 있는 것이다. 거기에 형식적인 문제도 있다. 장편과 단편은 쓰는 속도와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나의 장편소설 <카리부 아일랜드>는 더 느리게 진행된다. 가끔은 주인공에게서 벗어나 쉬어가는 대목도 있다. 하지만 단편은 두 주인공에게 이야기가 딱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 <자살의 전설>은 중단편집이기 때문에 압축적인 느낌이 더 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비극을 그리지만 풍경 묘사에 공을 들였다. =비극은 자연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보여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 문학의 전통을 봤을 때, 윌리엄 포크너나 애니 프루, 메릴린 로빈슨, 코맥 매카시처럼 말이다. 인물의 내면을 외부의 풍경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가 숲이나 물가를 묘사할 때 주인공의 마음 상태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고 사실 예술조차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자연이 원래 그러한 방식일 뿐이니까. 자연에는 그 어떤 가치판단이나 호오, 선악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숲이나 강을 완전히 중립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이 끼어들어 원래 거기 없던 것을 읽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환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당연하게도 주인공의 마음이 드러나게 될 수밖에 없다. 세상에 픽션이란 없다. 무엇이든, 우리 무의식의 구조물이다.
-중편 <수콴 섬>은 아들의 자살을 발견한 아버지의 이야기다. 어떻게 이 작품을 떠올렸나. =무의식의 힘을 깨닫게 된 계기가 바로 그 대목이다. 나는 그런 글을 쓰게 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소년이 자살하리라고는 문장을 반쯤 쓸 때까지도 몰랐다. 다음날 그 대목을 다시 읽으니 내가 쓴 글인데도 낯설더라. 그 대목이 모든 것을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그 이전에는, 아버지의 자살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아버지의 시체를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들의 죽음을 그리면서 나는 비로소 경험에서부터 거리를 만들 수 있었고, 쓸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무의식이 하는 일이다.
-다시 알래스카에 간 적이 있나. =케치칸에 28살 때 돌아갔다. 텅 빈 곳이었다. 그냥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곳. 그런데 나중에 <자살의 전설>이 나오고 알래스카에 북투어를 갔는데, 그때 아버지가 두 번째 결혼을 망치는 데 원인이 된 아버지의 애인과 그녀의 딸을 낭독회에서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의 모든 지인들도.
-어머니는 읽고 뭐라고 하셨나. =<더트>라는 장편은 어머니의 가족에 대한 것이다. 가족 내 폭력과 돈 문제 같은 실제 사건이 녹아 있다. 참고로 그 작품에서는 나를 연상시키는 젊은 남자가 어머니를 생매장하는 대목도 있는데, 그 대목을 보시더니 어머니가 갑자기 내 작업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웃음) 친할머니는 <자살의 전설>을 읽고 3일간 울었다면서,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다니 정말 끔찍하다고 하더라. 그건 정말 잘못 읽었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할머니는 가족을 더럽힌다고 그렇게 느끼신 것이다. 작가의 주변 사람들이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동생이 책을 안 쓰면 안 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래서 여동생을 앉혀놓고 말해주었다. 나는 너보다, 어머니보다, 나 자신보다 내 글이 더 중요하다고. 소설을 쓴다는 것은 전부 아니면 전무다. 그 중간에서 척하는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