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무하마드 알리는 어떻게 세상과 싸웠는가
2002-03-02

이 사내, 끝내 세상을 이겼군

복싱은 본능과 가장 지근 거리에 위치한 스포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생각처럼, 개인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가장 원초적 방법론과 복싱 사이에 확실한 유사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찬찬히 따지고 들어가면, 복싱은 매우 문명화된 `스포츠`다. 무엇보다도 복싱은 공격 부위와 방법을 엄격히 제한한다. 정확히 말해 상대의 벨트 라인 위쪽, 신체의 앞 부분을, 그것도 너클 파트라는 주먹의 특정 부위만을 써서 공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단 균형을 잃은 상대를 가격하는 것은 반칙이다. 게다가 상대를 가격하는 것은 이쪽의 맨주먹이 아니다. 글러브를 착용하고, 3분간 경기한 뒤 1분을 휴식하며, 정해진 시간 내에 승자가 가려지지 않을 경우, 점수로 승패를 가름한다는 이른바 퀸즈베리 룰(Queensberry Rule) 도입 이후, 복싱은 야성의 잔재를 털어내고 문명의 전당 안으로 진입하였다.그리고 어느 한쪽이 완전히 나가떨어지지 않더라도, 10초 동안 일어나지 못하면 그대로 승부를 마감하거나,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링의 로프를 3현에서 4현으로 촘촘히 하고, 체급의 간격을 더욱 좁혀 안전사고를 가능한 한 미연에 방지하는 등 나름대로 진보의 행마를 늦추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두 경기자의 주먹을 부드럽게 감싸는 글러브라는 완충물은, 이를테면 문명을 상징하는 도구에 다름 아니다. 왜 복싱은, 알리는 위대한가?

스포츠 경기로서 복싱의 위대한 점은 어디에 있는가. 복싱의 위대함은 중국 문명의 위대함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렇다면 중국 문명이 위대한 문명이라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이 문자와 도량형과 궤(마차바퀴 축의 길이)를 통일한 이후, 중국에서는 한자(漢字)라고 불리는 표기체계가 흔들림 없이 수천년을 이어져 내려왔다. 노예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쉬운 글자라 해서 진시황이 예서(隸書)라고 명명한 당대의 표준서체는 2200여년이 지난 지금 도장포에서나 주류 글자체 취급을 받고 있는 처지지만, 제자원리가 현행 상용한자와 통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현역 글자체인 것이다. 이 유구한 일관성. 복싱 역시, 고대 올림픽 경기와 비교해도, 그다지 경기 형태가 변하지 않은 종목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말은, 복싱에는 유사 이래 숱한 이들이 고구하고 분투한 자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뜻이다. 2천년의 더께를 얹은 테크닉과 훈련법이 아직도 현장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위에서 말한 문명과 역사의 뒤안길에는, 자본주의와 상업성의 도도한 물결이 있다. 복싱은, 어떤 점에서는 상품화하기가 가장 용이한 스포츠다. 무엇보다도 복싱은 기본적으로 개인 경기이다. 구기 경기에 비해 경기자를 양성하는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뜻이다. 용구나 시설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복싱은 고대 영웅담이나 서사시의 현대적 대용물이다. 영웅적 인물이 만난신고를 헤치고 갖은 고생 끝에 절정 직전에서 좌절하거나 혹은 정상에 올라 희열을 맛본다는 구조는 더 꾸미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복서들의 삶에 고스란히 뿌리를 담그고 있다. 그리고 승부의 의외성. 통계적으로, 일발역전(一發逆戰)의 러키 펀치가 터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복싱은, 아무리 세 불리하고 점수에서 뒤지고 있다 하더라도, 최후의 순간까지 승리에의 희망을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다.

이처럼 별다른 각색을 할 필요도 없이, 기존의 요소에 약간의 양념만을 가하면, 복싱은 경기 외적인 파생상품을 가장 수월하게 만들 수 있는 스포츠이기도 하다. 복싱의 자본주의적 측면은 경기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텔레비전이 세계 스포츠를 좌지우지하는 실질 권력으로 등장한 이후, 복싱은 이 막강한 대중매체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라운드 사이사이의 시간은, 시청자들의 집중도라는 기준으로 평가하면, 더할 나위 없이 농도가 짙은 광고 시간이다. 게다가 복싱은 경기자의 모습이 화면에 가장 크게 잡히는 스포츠이기도 하다. 경기복으로부터 신발이며 헤어스타일에 이르기까지 광고탑으로 이용할 거리가 얼마든지 널려 있다는 뜻이다. 상대방 선수 신발바닥의 광고권을 사고 싶다는 뼈있는 농담(우리 편이 KO로 이길 것이라는 뜻. 길게 누운 상대 선수를 비추는 화면에는 틀림없이 발바닥이 들어가야 하므로)은 기실 100% 농담만은 아닌 것이다.56승 중 KO승이 37번

그렇다. 복싱은 문명이고 역사이며 자본주의이고 상업주의이다. 복싱의 위대성은, 이 겹겹의 울타리를 한꺼풀만 걷어내면, 거칠게 포효하는 인간의 야성과 바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야성과 문명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 경기가 복싱 외에 달리 무엇이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무하마드 알리가 누구냐고 묻는다. 감히 단언하건대 알리는 복싱이 낳은 사상 최고의 전사(戰士)이다. 알리에게 승점을 기록한 3인의 복서 중 한 사람이자 그의 턱을 부숴놓은 유일한 인물인 켄 노턴은(알리와 통산 1승2패) ‘복싱은 알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그러나 알리는 복싱에게 더 많은 것을 주었다’라는 헌사를 바치기도 했다. 근현대사의 위대한 인물들의 초상을 모아놓은 영국 초상화 박물관(런던)에 가면, 전 영연방 헤비급 챔피언 헨리 쿠퍼(알리에게 2전2패. 두번 다 KO패)의 초상화를 발견할 수 있다. 선정 이유는 그가 알리를 녹다운시킨 최초의 복서라는 것.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알리를 한 차례나마 주저앉혔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인물로 불릴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다. 전문가들 중에는, 알리를 고대 그리스 시대를 포함하여 가장 위대한 복서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복서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인간의 신체를 가지고 알리보다 훌륭한 경기를 펼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알리는 도대체 얼마나 위대한 복서란 말인가?역사의 물줄기를 좇아가다 보면, 역사가 어느 특정한 개인과 만나 폭포처럼 분출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 개인들을 천재 혹은 시대의 창조자라고 부른다. 알리는, 시대의 창조자라고 불릴 당당한 자격이 있다. 경기장 안팎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보다 더 수많은 사람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일개 운동 선수가 아니었다. 경기 내적으로 보면, 그는 복싱 기술을 혁명적으로 뒤바꾼 사람이다. 헤비급이라는 체급에 스피드와 풋워크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이를 실제로 보여준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스피드와 풋워크는 실상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헤비급에 통용되던 개념은 아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스피드와 풋워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순발력이다. 그러나 순발력과 파워는 양립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한꺼번에 앉고 설 수가 없는 것처럼, 개개의 복서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한쪽 길로 매진해야 한다. 그런데 헤비급에는 거의 모든 선수들이 파워쪽을 택하는 불문율이 있다. 펀치력은 체중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그러나 맷집은 체중에 비례하여 증가하지 않는다. 중량급으로 갈수록 KO로 판가름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헤비급은 체중 제한의 상한선이 없는 체급이다. 그러므로 순발력을 이용하여 점수를 많이 벌어놓아도, 한방을 제대로 허용하면 만사휴의(萬事休矣)로 돌아갈 위험성이 상존한다. 확률상, 스피드의 길을 추구하려야 추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알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법을 써서 보란 듯이 성공했다. 오청원(吳淸源)의 신포석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알토란 같은 귀와 변을 모두 내주고, 황무지처럼만 보이는 중원에 꿈을 심는 다케미야(武宮正樹)의 우주류(宇宙流) 바둑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비킬라 아베베는 올림픽 마라톤을 2연패한 최초의 선수이기 때문에 추앙받는 것이 아니다. `지구력`만으로 시종하며 42.195m를 달리는 마라톤에 `스피드`라는 개념을 최초로 도입했다는 사실, 그리고 20분대 초반에 머물던 마라톤 기록을 10분대 초반으로 획기적으로 끌어내린 업적 때문에 사관(史官)들의 평가를 받는 것이다(64년 도쿄올림픽 우승 기록은 2시간12분11초2). 알리는 선수생활 내내 상대의 몸통을 거의 공격하지 않았다. 오직 안면만을 공격해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스피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알리가, 스피드가 극한에 다다르면 그것이 파워를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는 사실이다. 짧게 끊어치는 정확한 펀치. 알리는 56승을 거두었고 이중 37승이 KO승이다.장원재/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비교연극학, 스포츠평론가<사진설명>1.2 무하마드 알리3. 1996년 아틀랜타 올림픽 성화봉송 최종주자로 나선 알리 4. <알리> 촬영현장에서 마이클 만 감독과 이야기를 하는 알리의 최근 모습▶ 무하마드 알리는 어떻게 세상과 싸웠는가(2)▶ <알리> 주연배우 윌 스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