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에 드문 악덕 프로듀서들이 나타났다. 가수와 수익 배분은 9 대 1, 계약서엔 “모든 피해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진다”고 적어 반강제로 도장을 받는다. 사무실은 건물 옥상 옆 평상, 녹음실은 가수 인맥으로 대여, 밴은커녕 좁은 승합차에 끼어 이동하고 뮤직비디오는 길바닥에서 휴대폰으로, 심지어 가수가 ‘셀카 모드’로 찍는다.
하지만 이름조차 알리기 어려운 아이돌 레드 오션에서 이들이 키운 그룹 ‘빅병’은 확실히 눈도장을 찍는 데 성공했다. 작곡가 ‘용감한 이단’ (데프콘)과 작사가 ‘호랑이’ (정형돈)가 함께하는 MBC 에브리원 <히트제조기>를 통해서다. 그동안 <주간 아이돌>을 통해 묻힌 아이돌도 살려내 캐릭터를 만들어준다는 평을 받으며 아이돌계 미다스의 손으로 자리 잡은 두 사람이 역시 반강제로 결성한 이 프로젝트 그룹의 멤버는 비투비의 육성재, 빅스의 엔과 혁, 갓세븐의 잭슨이다. 아이돌에 관심있는 이들은 이미 알지만 아직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들에게 용감한 이단 호랑이는 각각 육덕, 차돌백이, 혁띠, 왕콩이라는 예명을 선물하고 거칠게 굴린다. 특히 때 되면 배 꺼졌다며 과자 부스러기를 진공청소기처럼 흡입하거나 핫바와 치킨을 정신없이 뜯으며 ‘먹방’으로 프로그램 정체성을 바꿔놓는 프로듀서들이 고운 아이돌들에게 우물우물 던지는 멘트는 혹독하기 그지없다. “음악을 전혀 안 배웠나봐?” “어떻게 가수가 된 거야?” “그런 톤, 그런 말투로는 우리 곡 소화 못해.”
하지만 이 거만하면서도 좀처럼 비위 맞추기 힘든 형님들의 태도는 신인 아이돌을 띄우는 그들만의 원천 기술이다. 신인다운 열정은 넘치지만 어딘가 어리바리한 멤버들은 청양고추에 소금 찍어먹으면서 달다고 허세 부리는 형들을 보며 패기롭게 두개를 삼키고, 그만하라고 구박받을 때까지 개인기를 선보인다. 기껏 신곡을 줘놓고 “절대 안 뜰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단언하는 프로듀서들 앞에서 이 형들이 지금 진심인지 장난인지 혼란스러워하는 멤버들의 흔들리는 눈빛은 귀여울수록 더 놀려주고 싶은 인간의 본능을 자극한다.
비록 데뷔곡을 내놓음과 동시에 은퇴 수순을 밟은 한시적 그룹이지만 그 한달 사이 멤버 모두에게 정이 들어버린 것도 그 때문이다. 야망 있는 도련님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면 허술한 육덕과 차분한 표정으로 끈질기게 “섹시하고 싶다”고 주장하는 차돌백이, 순둥이 같지만 은근히 엉뚱해서 눈을 뗄 수 없는 혁띠, 이미 예능계 블루칩으로 떠오른 자유로운 영혼 왕콩, 각자 원래의 그룹으로 돌아가더라도 빅병과 용감한 이단 호랑이를 잊지 않길. 그리고 연말 시상식에서 특별무대 한번만 해주길. 응원도구로 500ml 물병들고 찾아갈 테니.
+ α
빅병의 데뷔곡 <스트레스 컴온!>
앉은자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 같지만 인생의 진실과 맞닿아 있는 정형돈의 가사는 이번에도 심금을 울린다. “같은 일을 해도 연봉이 차이나 스트레스/ 퇴근하라면서 앉아 있는 과장님 스트레스/ 불금은 회식자리 숙취는 토요일! 일요일은 출근 전날이라 아 스트레스.” 마감하고 밤샘하고 또 마감하는 지금 나도 아 스트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