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휴가 때도 집에 있었다. 방에서 뒹굴기만 해도 시간이 빨리 가는데, 휴가를 보내고 나면 사람들은 꼭 묻는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어차피 대단히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닐 테지만, 매번 “그냥 집에 있었어요. 게을러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다 보니…”라며 김빠지는 대답을 주절주절 늘어놓느라면 어쩐지 궁색한 기분이 든다. 지금이 내가 살아갈 날들 중 그나마 가장 젊은 때인데 그저 귀찮다는 이유로 기회를 버리다니 너무 한심한 게 아닐까? 남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이든 제주도 올레길이든 잘만 다니며 친구도 만들고 경험도 쌓던데 방구석에서 트위터만 들여다보다 남은 게 뭔가. 평생 부지런히 다녀도 이 넓은 세상의 지극히 일부밖에 보지 못할 텐데 언제까지 우물 안 개구리로 살 텐가!
하지만 ‘청춘’이라기엔 불혹을 훌쩍 넘긴 윤상, 유희열, 이적이 미팅인 줄 알고 참석했다가 그대로 페루까지 끌려가며 시작한 tvN의 <꽃보다 청춘>처럼,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일상의 쾌적함을 상당 부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예산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어지간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 여행은 기회비용과의 끝없는 싸움이다. 짐을 줄여 배낭을 메고 양손을 자유롭게 쓸 것인가, 캐리어에 깔끔하게 짐을 정리하는 대신 한손이 부자유스러운 채 다닐 것인가. 5분 더 샤워를 할 것인가, 그 시간에 조식을 먹을 것인가. 화장실 문 앞에 긴 줄이 늘어선 민박에서 잘 것인가, 비싸더라도 화장실 딸린 호텔방을 구할 것인가. 혼자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라면 서로의 욕구와 허용 범위의 차이까지 곱해져 갈등 요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양보와 배려라는 건 말이 쉽지, 안락한 ‘나의 세계’를 벗어나는 순간 마음의 여유는 확 쪼그라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꽃보다 청춘>에서는 요금을 더 받으려는 택시 기사와의 신경전, 예산을 아끼느라 구한 숙소에 대한 실망감, 얼른 관광하고 싶은 사람과 샤워부터 하고 싶은 사람의 입장 차 등 사소해 보이지만 쿨하게 넘길 수 없는 여행의 고비들이 종종 드러난다. 특히 수건 한장을 셋이 나눠 쓰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자타 공인 ‘온실형 화초남’ 윤상의 개인 화장실 딸린 방을 향한 집착은 언뜻 답답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절실히 공감되는 지점이다. 웹툰 <SM 플레이어>의 명대사 “난 하기 힘든 일은 하기 힘들어하는 성격이라구!”처럼,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유독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사람은 있는 법이다. 게다가 본래 적절한 타이밍과 독립된 공간은 몸과 마음에 평화를 깃들게 하는 배변 활동의 필수조건 아니던가. 그러나 그런 윤상을 배려해 새 숙소를 알아보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이적이 윤상의 눈치 없는 말 한마디에 울컥하는 데 이르면 괜히 둘 사이에 낀 친구의 마음으로 전전긍긍하게 되니, 이만큼 실감나는 여행 대리 체험은 흔치 않을 것 같다. 즉 올해 휴가는 페루에 마음으로 다녀왔다 치면 되겠다는 얘기다.
+ α
방송의 적에서 방송의 천사로
셋 중 막내 된 죄로 성격이 극과 극인 두형을 열심히 챙기는 이적(만 40살)의 고군분투. 윤상의 무심함에 서운해하다가도 “사심 없이 배려해야 하는데 아직 저는 생색의 마음이 있는 거예요. 바로 그 자리는 아니어도 알아주길 바랐거든요”라고 털어놓는 성찰적 태도에 괜히 뜨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