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승전결은 초등학생 때부터 배워 알지만 스토리-시놉시스-장 구성-트리트먼트-시나리오로 가는 단계를 나는 모른다. 배운 적도 없고 공부한 적도 없다. 글쓰기를 글로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는 시나리오 작법서를 읽다가 포기하고 나서야 느꼈다. 대신 영화사 기획실에 있으면서 수백편이 넘는 시나리오를 봤으니 그것이 오히려 큰 공부가 됐다. 그래서 누군가가 시나리오 구조와 구성에 대해 물어보면 그만큼 난감할 때가 없다. 전문적으로 공부를 안 했다고 솔직히 실토를 했을 때 ‘감각적인 글쓰기’라고 치켜세우는 것도 부끄럽고 ‘잘났어 정말’ 하듯 흘겨보는 눈을 감당하기도, 마주치기도 싫다. 그럴 때 끌어대서 얘기를 하는 것이 ‘탑’ 이야기다.
탑은 원래 부처의 유골(사리)을 모시는 것으로 ‘붓다의 무덤’이라고 한다. 제일 꼭대기(상륜)에 사리를 모시기 위해 그 아래 몸체(탑신)를 높이 올리고, 탑을 떠받칠 기초(기단)를 튼튼히 한다. 석탑이나 목탑이 3층, 5층, 7층이나 9층 등 홀수를 유지하는 반면, 탑 면은 4각에서 8각까지 짝수로 구성해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꼭대기에 사리를 둔다는 것이다. 사리 하나 모시자고 그 어마어마한 공사를 하다니, 그건 절정부에 정점을 찍기 위해 100여개의 신을 써나가는 시나리오와 다를 바가 없다. 정확한 설계가 없어서는 불가능하고, 정성이 깃들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탑은 기단부가 튼튼하고 탑신부는 매끈하고 상륜부는 화려하다. 설정이 튼튼하고 전개가 매끈하고 절정이 화려한 시나리오, 탑을 볼 때마다 ‘저런 시나리오 하나 썼으면 좋겠다’는 부러움이 몽실몽실 피어난다.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정성과 기원을 담기에 부족함이 없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기획을 하고 피칭을 했고 모니터도 받았다. 대충 예산 범위를 정해 ‘7층 목탑’ 정도로 구조를 잡았으니 이제 첫 신을 쓸 차례다. 젠장, 안 써진다.
첫 신을 쓴다는 것은 결혼을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연애기간이 길다고 상대방을 온전히 다 아는 것이 아닌 것처럼, 오랜 시간 생각을 했다고 온전히 글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기획하고 스토리를 잡는 것은 말 그대로 데이트를 하는 것이고, 피칭을 하는 것은 불안과 기대, 양가 상견례와 다를 게 없다. 계약은 말 그대로 신혼여행이다. 달콤하다. 여행이 끝나면 삶이 시작되는 것을 아직 모르기에 더욱 행복하다. 첫 신을 쓰는 것은 행복하지만 전쟁이다. 특히나 생각이 숙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맞선을 보고 후다닥 결혼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낯설다.
첫 신은 생각이 텍스트로 변하는 첫걸음이다. 첫 신이 풀리지 않으면 뒤가 힘들다. 첫 신이 술술 풀린다고 다음 신도 덩달아 잘되리란 보장도 없다. 그래도 잘되겠지, 잘 해내겠지 다짐을 할 수밖에 없으니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은 두려움과 자신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다. 어느 쪽으로도 떨어지지 않고 무사히 걸어가는 것, 그것이 글쓰기의 재미이자 묘미라고들 한다.
억지로 첫 신을 끝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한다. 누가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시작은 시작일 뿐이다. 이걸 시작으로 20여개의 신이 7층 목탑의 기단부가 될 것이다. 튼튼하지만 투박해 보여서는 안 된다. 기단부가 완성되면 매끈한 탑신 세우기가 시작된다.
마지막 돌을 올릴 때까지 체력이, 그리고 정성이 바닥나지 않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