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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물에 치밀한 검증 더한 < CSI 과학수사대 >

X파일은 가라, 진실은 내 손안에

MBC 토요일 오후 1시10분, OCN 수·목 오후 8시50분(3월20일부터) “<X파일>은 이제 한 시대의 끝에 서 있습니다. <CSI 과학수사대>는 출발선에 서 있지요. <X파일>은 ‘만일?’이라는 명제를 도출합니다. 비행접시가 정말 있는가? 누가 알겠어요? 모든 것이 애매모호합니다. 그러나 우리 쇼는 사실을 다룹니다. <서바이버> 같은 게 아닙니다. <CSI 과학수사대>는 진짜 사실을 다루는 드라마입니다.”(윌리엄 패터슨, <USA 위크엔드> 인터뷰)

<CSI 과학수사대>는 확실히 새 시대의 드라마다. 피도 적당히 터지고, 인물들도 적당한 수로 나오고, 연령층도 다양하고, 액션도 있는 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미있다. 던져주는 실마리가 어떻게 들어맞을까 생각하는 동안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나아간다. 그 재미는 순전히 한 10년 정도 잊어버리고 있던 <형사 콜롬보>나 <제시카의 추리극장> 등에서 맛볼 수 있었던 퍼즐맞추기의 재미이다. 80년대 복고로 다시 돌아오는 현상? 물론 그렇게 해석해도 좋다. 그러나 모든 복고의 원칙, 이전 것을 가져와서 새로워 보이도록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CSI 과학수사대>는 추리력에 한 가지를 더 한다. 정밀한 과학적 절차. 단지 머리로 꿰어맞추는 게 아니라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사건현장조사반’(Crime Scene Investigation), 약어로 CSI. 길 그리섬이 이끄는 라스베이거스 과학수사 심야수사반들의 활약을 그린 드라마이다. 사건에 사건이 벌어지는 라스베이거스. 모든 사건해결의 기초 열쇠는 경찰도 FBI도 아니고 바로 현장을 조사하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이들이 발견해낸 증거가 있어야만 어떤 것이 사실이며 진실인지, 범죄를 누가 저질렀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화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했다 해서 화제를 모았지만, 사실 <CSI 과학수사대>는 역시 제작자이자 그리섬 역의 윌리엄 패터슨 그 자체이다. 윌리엄 패터슨은 제작자로서 이 드라마를, 자기 자신을 어떻게 광고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누가 따지고 들어도 바늘 하나 찌를 수 없이 치밀한 작품을 내놓는 것이다.

<X파일>이 사람들에게 퍼즐을 확 던져버려 알아서 맞춰보라고 한다면, >CSI 과학수사대>는 우리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퍼즐을 맞춰나갈지 잘 보라는 서비스가 강하다. 치밀한 퍼즐맞추기에 모든 것을 거는 <CSI 과학수사대>의 메말라보이는 ‘하드보일드’적인 성향은 추리극의 버전업으로 보인다. <CSI 과학수사대>는 현실에 발붙이는 가장 기초적인 사안, 철저한 조사를 통해 가장 사실적이고 진실한 결론을 얻는 과정을 서스펜스로 만들어나간다. 진실은 애매모호함이 아니다. 논란거리도 아니며, 명백한 사실인 것이다. <CSI 과학수사대>를 상징하는 말은 ‘진실은 저 너머에’가 아니라 ‘진실은 우리가 밝혀낸다’이다.

그러나 현실을 다루는 <CSI 과학수사대>는 현실을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현실이 아니라 저게 현실이겠거니, 하는 ‘도식’을 맞춰나간다. <CSI 과학수사대>가 2000년대 미국이라는 새 시대를 대표한다는 말은 단지 제작자의 허풍 섞인 포부가 아니라 사실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무언가 ‘확고한 것’을 원하게 되었고, 불확실한 현실에서 뭔가 확실한 것을 던져주는 존재를 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이 연설을 확신에 찬 연설이 그렇듯 때론 그 확고한 것이 위험천만하고 독단적이며 일방적 진리가 된다. <CSI 과학수사대>도 그런 위험성을 똑같이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이렇더라, 라는 도식. 과학적 검증성이라는 것도 사실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다. <X파일>이 바로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던가. 10년 지나다보니 다들 둔감해져서 그렇지. 철저한 조사, 과학적 추리, 정확한 증명. 이 모든 것이 사건 해결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이고, <CSI 과학수사대>가 이러한 정밀성에 있어 스위스 시계를 능가하는 치밀함을 기가 막히게 선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계가 애초 존재했다는 것은 기억해둘 만한 사항이다. 그 한계야말로 <CSI 과학수사대>가 정말로 2000년대를 대표할 드라마가 될지 아닐지를 결정할 것이다.

철저한 현실성을 부르짖는 <CSI 과학수사대>가 현실감을 의외로 잃어버리는 지점이 있는데, ‘이야기’가 아니라 쭉쭉빵빵한 ‘구성원’, 배우들이다. 아무리 마이애미가 배경이라고 해도 마이애미 인구 90%가 모델이 아니다. 아무리 정교한 추리력을 발산해도, 제작자이며 주인공인 그리섬 빼고 보기에 좋아 보이는 배우만 선발한 것이 너무 눈에 띤다. 초기 에피소드 중(초기라서 안심하고 스포일러 발산중), 알고 봤더니 한 여자가 산악가였다(예상치 못하게 그 여자가 혐의자다). 팔이 내 손목보다도 가냘프고 여리여리한 여자가 돌벽을 타는 산악가였다고? 난 뜻밖의 범인 출현에 경악하기는커녕 그만 폭소를 터뜨렸다. 서비스 정신은 너무 과도하면 탈을 일으키는 법이었다. (아 참, 윌리엄 패터슨 인터뷰를 찾아주신 분께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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