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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의 TVIEW] 성공한 잉여라니까

< SNL 코리아 >의 코너 ‘극한직업’ 띄운 유병재

막상 원하던 자리에 오르고 나니 인생의 최종 목표를 잃고 무기력해진 각하의 심경을, 아마도 대학 시절의 나였다면 무척 공감했을 것 같다. 대학만 들어가면 창창한 미래가 펼쳐질 거라 믿었는데 공부는 하기 싫고 놀 줄은 모르고 인기도 없는 스무살에게 멋진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수업시간 내내 자다가 끝나자마자 집에 돌아와 방에 처박히거나, 학교에 가는 척하다 아이스크림 몇개 사들고 친구 집에 가 처박히거나. 비디오를 보다 잡지를 뒤적이다 친구가 키우는 토끼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10년쯤 뒤, 한 인터뷰이로부터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대학에 들어가긴 했는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도 어렵고 친구 사귀기도 힘들고 수업 내용도 잘 모르겠고… 나는 놀지도 않고 공부도 안 하는 애였다. 수업 끝나면 자취방에 와서 다음날 아침까지 휴대폰 게임만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제대 뒤 한 방송사의 개그맨 공채 시험에도 떨어진 그는 친구들을 모아 코믹한 UCC를 찍기 시작했다. 미니홈피와 인터넷 유머 게시판에 달린 “ㅋㅋㅋ” 댓글이 동력이었다. 하지만 어느 하나 쓸데없어 보이는 그 짓들로 인해 그는 UCC 스타가 됐고 방송에 캐스팅됐다. ‘잉여’의 정수 같은 경험담을 들려준 그는 Mnet <유세윤의 아트 비디오>에 속을 알 수 없는 ‘조연출’로 출연하던 대학생 유병재였다. 앞으로도 계속 재밌는 걸 만들고 싶다는 그에게 가장 자신 있게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가 뭐냐고 물었을 때 유병재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나마… ‘찌질이’ 아닐까요?”

‘찌질이’라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그 뒤 tvN <SNL 코리아> 작가로 일하게 된 그는 자신이 대본을 쓰는 코너 ‘극한직업’에 ‘매니저 유병재’로 출연한다. ‘잊을 만하면 극한직업’(온주완 편), ‘아니나 다를까 극한직업’(이휘재 편) 등 호스트마다 수식어는 달라지지만 중요한 건 성질 나쁜 스타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매니저의 수난기다. 철 지난 개그로 꼰대질을 하는 주병진이나, 말대꾸하지 말랬다가 대답이 없다고 갈구는 DJ DOC 등 다채로운 캐릭터의 ‘갑’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바삐 눈치를 보던 그가 소심하게 반항하다 따귀를 맞고 마침내 혼자 울분을 터뜨리는 순간은 이 코너의 클라이맥스다. 특히 신해철 매니저를 연기한 그가 ‘형님’한테 악플 달던 초딩과 계급장 떼고 유치하게 맞붙는 신은 우울할 때마다 돌려볼 만한 명장면이다. 얼마 전 유병재를 다시 만났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던 시간을 지나 자신이 한발 나아갈 수 있었던 데 대해 “해놓은 게 없으니까 하고 싶은 게 생겼다”라고 말했다. 그 뒤 가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성공한 잉여’인 그의 말을 떠올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히 든든해진다.

+ α

영원히 고통받는 유병재의 레전드 에피소드

조성모가 ‘생마초’ 행세를 하는 여왕벌 캐릭터를 완벽히 연기한 ‘여태껏 극한직업’편. 눈치 없이 커피 대신 매실음료를 사온 데다 조성모에게 “형, 요즘 살찐 것 같다”라는 말실수까지 하는 바람에 만만한 남자친구처럼 들들 볶이는 유병재, 끝까지 자신이 잘못 찌른 포인트를 깨닫지 못하는 순수함이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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