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친구들>의 이도윤 감독은 한양대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단편 <우리, 여행자들>(2006)과 <이웃>(2008)으로 각각 부산국제단편영화제와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영화 속 세 친구와 비슷한 나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눈이 반짝거려 좀더 어려 보이는 인상이다. 같은 카페에서 인터뷰 중이던 대학 동문인 배우 지성이 휴식을 틈타 슬쩍 고개를 내밀고 “우리 과의 희망”이었다고 감독을 소개했다. 아주 농담만은 아닌 것 같았다.
-중국 설화집 <태평광기> 16권 ‘기의’ 편 중, ‘파경’(破鏡)의 어원을 그린 이야기를 모티브로 <좋은 친구들>을 구상했다고 들었다. 전란이 닥치자 부부가 반으로 나눈 거울을 정표로 나눠 갖고 헤어졌다 재회하는 일화인데 구체적으로 연관성을 설명한다면. =‘파경’의 고사는 여러 판본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버전은 재회한 부부의 거울 조각이 어긋나는 이야기다. 남편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고스란히 거울을 간직해 원래 모양인데, 아내는 남편을 그리워할 때마다 거울을 쓰다듬다보니 가장자리가 둥글려져버렸다. 그런데 남자는 그것을 아내의 변심이라 받아들여 떠난다. 그런 게 사람 사이의 오해라고 생각한다. 진심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와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작은 이유로 등을 돌린다. <좋은 친구들>의 인철(주지훈)과 현태(지성)는 쪼개진 거울의 두쪽이다. 17년 전 조난당했을 때 인철에게 품은 의심으로 현태의 거울 모서리는 조금 떨어져나갔고, 이후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 열심히 닦아서 모양이 변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인철의 거울은 원래대로다. 민수(이광수)는 두쪽의 거울을 붙들어 매는 틀이다. 민수라는 프레임에 싸여 있을 때는 두 거울이 마주 보지 않아도 좋지만, 틀이 떨어져나가면 문제가 생긴다.
-구성이 대범하다. 17년 간격으로 벌어진 두 사건에만 집중하며, 세 주인공의 인생에서 중요했을 법한 중간의 사연들을 생략했다. 몽타주 시퀀스나 군데군데 플래시백으로도 부연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 방향은 확고했다. 내가 굉장히 상태가 좋지 않았던 서른두셋 무렵,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동안의 인생은 기억나지 않고 태어날 때부터 그런 상태였던 것 같더라. 그편이 사실적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같이 지낸 친구들이 새삼 저간의 사정을 입에 올리는 건 관객 들으라는 설명밖에 안 된다고 생각했다.
-유년의 치명적 사건에서 곧장 수십년 뒤로 점프하는 시나리오 구성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스틱 리버>를 불가피하게 연상시킨다. 좋아하는 작품인가. =데니스 루헤인의 원작 소설을 워낙 좋아했다. 책부터 읽었고 시나리오 9, 10고를 썼을 즈음 영화를 찾아 보았다. 어렵고 긴박하게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 핵심을 확 끌어내는 지점을 툭 던지는 이스트우드의 연출법을 보며, 여든 되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중간 과정이 영화에서 생략될 때 배우가 갖는 어려움이나 질문이 있었을 것 같다. =배우들한테는 약간의 연대기를 제시해 공백을 해결해주려고 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배우들이 이상스러울 만큼 극중 인물과 비슷해서 생각을 바꿨다. 대신 질문하는 편지를 세 배우에게 각각 썼다. 현태는 왜 미란과 결혼했을까? 민수의 부모님은 어떻게 돌아가셨을까? 내 가설보다 훨씬 훌륭한 답장이 돌아왔다. 인철 역의 주지훈이 숨은 스토리에 제일 무심했다. “아, 과거가 뭐가 중요해. 지금 인철이가 먹고사는 게 중요하지!” (폭소) 인철이랑 정말 비슷했다.
-<좋은 친구들>은 요컨대 두 사건 사이의 대화다. 중학교 졸업식 날 벌어진 조난 사고와 17년 뒤 오락실 화재는 감독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관계로 맺어져 있나. 전조와 사건? 거울상? 희망과 절망? =완벽한 수미쌍관은 아니지만 원래는 과거와 현재가 구체적으로 맞물리는 세부가 더 있었다. 이 영화에서 행동을 주도하는 인물은 인철이지만 주제를 끌고 가는 캐릭터는 현태다. 그래서 화자인 현태 입장에서 구조를 파악하면 편해진다. 소년 현태는, 구조대를 끌고온 인철에게 애초부터 돌아올 생각이었냐고 확인하지 못한다. 현태는 친구를 의심했다는 자책을 지우기 위해 은연중에 인철이 돌아오지 않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30대인 현재에도 현태는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친구를 믿지 못하는 상황으로 자기를 밀고간다.
-비극의 중심인 오락실 화재 시퀀스는 도입부까지만 해도 장난스럽게 진행된다. 이 시퀀스 내부에 분기점이 있다면 어디라고 생각하나. =무겁게 가야 하는 게 아닐까 현장에서도 반신반의했는데, 차 트렁크에서 파이프를 꺼내는데 배우가 흠칫 쫄더라. 그 NG컷에서 힌트를 얻었다. 범죄 경험 없는 인물의 어설픔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에서 확보되는 리얼리티가 있었다. 주지훈 배우가 그러더라. 사고를 당해보니 정작 그 순간에는 “으악” 하는 게 아니라 “어어” 한다고. 그러다가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 불쑥 나타나는 CCTV 화면 숏이 분기점을 만든다.
-인철의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좀 허세스럽게 움직이고 민수네 집에서는 슬슬 다가간다. 인물이나 공간별로 설정한 촬영 조명의 원칙이 있었나. 둘 혹은 셋이 모이는 장면의 구도는 어떻게 잡았나. =캐릭터를 방해하지 말자는 것이 큰 틀이었다. 유억 촬영감독님은 평범한 오버 더 숄더 숏도 카메라를 삼각대에 얹지 않고 트랙을 깔아 배우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조명도 18kW 조명으로 기본광을 치지 않고 어두운 가운데 아기자기하게 갔다. 둘이 있는 장면은 같은 방에 널브러져 있는 친구의 시선에 카메라를 대입하려 했고, 셋이 모이는 장면에서는 시점을 중시했다. 사건이 어그러질수록 극단적으로 편을 가르는 앵글도 있다. 민수 부모님 제사 장면은 현태 대 현태에게 반응하는 인철과 민수의 구도로 확연히 나뉜다.
-인물들이 부산에서 성장하고 생활하는데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사투리를 쓰고 연기를 불안하게 하느냐 사투리를 포기하고 안정적으로 가느냐의 선택이었나. =그렇다. 감독인 내가 서울 사람이라는 점이 컸다. 외국어 연기를 듣고 오케이를 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해당 지역 관객은 사투리 연기에 매우 까다롭게 반응하더라. 배우들에게도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 소년의 성격과 그룹 내 역할이 성인이 된 뒤 변형된 형태로 지속되는 점이 영화 초반 흥미를 끈다.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썼나. =우선 민수는 키가 40cm쯤 컸다. (웃음) 민수와 인철은, 성격도 둘의 관계도 별로 변하지 않은 반면, 현태는 큰 변화가 있다. 산속에서 무서워서 울던 중학생이 감정 없어 보이는 남자로 변한 과정에 관객이 궁금증을 갖길 바랐다. 이유는 나중에 나온다. 17년 동안 현태는 친구를 온전히 믿은 적이 없는 것이다. 이는 뒤에 치사함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용서는 해야겠는데 상처는 하나 주고 싶고, 그래서 인철에게 할 말 없냐고 묻는다. 이 영화의 인물들이 가진 치사함이 있는데 민수의 치사함이 제일 아프다. 자기가 해친 사람의 장례식에 갈 수 있는 성품이 아닌데 안가면 의심받으니까 억지로 스스로를 끌고 가는 장면이 그렇다.
-막판에 갈등하는 민수가 청각장애가 있는 현태의 아내와 만나는 장면에서 수화를 자막처리하지 않았는데. =민수가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네”라고 슬프게 말할 때 관객도 똑같이 느꼈으면 했다. 그는 미란의 수화를 “괜찮아. 같이 계속 이렇게 살자”라로 읽고 싶어 한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치사한 마음에 찾아온 거다. “나도 수화 배울까?”라는 민수의 반문은 그러니까 “나 이렇게 계속 지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세 주연 중 둘이 남다른 장신이라는 사실이 촬영에 준 실제적 어려움은. =다음 영화는 170 이하의 배우들과 하려고 한다. 다들 나를 너무 무시해서…. (웃음) 우리 영화는 오락실 비상계단을 제외하면 세트가 없는데 민수의 집은 천장을 파헤쳐 라이트를 심었다.
-민수의 장면에서 시나리오에 없는 디테일들이 많이 눈에 띈다. 배우에게 영향을 받은 요소가 있지 않을까 추측했다. 예를 들어 문상하다 눈물이 터지는 시점이나…. =원래 현태의 딸이 울면 민수가 이상한 얼굴로 쳐다본다는 계획이었는데, 배우가 눈물을 못 멈추더라. 그편이 옳았다는 사실은 편집실에서 깨달았다. 민수가 신변을 정리하는, 시나리오상 간단한 장면을 찍는데도 보는 사람들이 자꾸 가라앉더라. 원래 욕심냈던 숏은 민수가 옷을 다리면서 자꾸 떨어지는 물방울 얼룩을 지우려고 애쓰는 숏이었는데 그래서 밥 먹고 설거지하는 광경이 대신 들어갔다. 연기도 그렇지만 이 영화는 묘하게 “민수 밥 챙겨주는 영화”다. 현태도 인철도 제일 많이 하는 대사가 민수 끼니 이야기다. 민수는 그런 존재인 거다.
-일반 시사회에서 이광수 배우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 관객이 그에게 품은 호감을 피부로 느꼈다. 이는 영화에 득이 되기도 하지만 방송 이미지와 일치하는 유머에 대한 기대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주지훈의 모델스러운 외모도 마찬가지다. 캐스팅 결정 이후 어떻게 이 배우들의 개성과 연기 스타일을 흡수할 것인가 고민했을 텐데. =프롤로그가 끝나고 현재시제가 시작될 때 제일 먼저 등장하는 배우가 광수다. 본인이 웃겨 보일까봐 걱정이 많더라. 바로 그걸 이용하고 싶다고 부탁했다. 자연스럽게 발길질하며 친구랑 놀라고. <일요일이 좋다-런닝맨> 말투도 나온다. 민수는 어차피 중반 이후 확실한 전환점이 있는 캐릭터라 기존 이미지를 버리는 게 불가능하다면 굳이 이용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새벽 5시 촬영에도 취한 장면은 실제로 취해서 찍을 정도로 배우의 열의가 높았다. 주지훈은 살을 찌워야 했다. 인철의 방탕한 생활을 고려할 때 기존의 몸은 용납이 안 됐다. 신나게 먹었다. 반면 지성은 일반 소방대원도 아닌 특수 구조대원이라 몸이 보통 사람과 달라야 했다. 팬클럽에서 뷔페를 준비해왔는데도 자제하더라. (웃음)
-인철은 현태 어머니에게 아들로 불리고, 현태 딸한테는 아빠를 자칭한다. 세 친구는 서로 부모님 잘 모시라고 잔소리하며 제사를 챙기면서 정작 친부모한테는 그렇게 못한다. 셋의 인생을 하나로 합쳐서 생각하는 특이한 사고방식이다. =현실에서는 관혼상제 가길 싫어하는데 영화에는 장례식과 결혼식을 넣는 걸 좋아해서 장편 시나리오 쓸 때마다 포함시켰다. 추하기도 하고 숭고하기도 한 인간의 속내가 아이로 니컬하게 얽히는 장소라고 생각하고,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좋다. <좋은 친구들>의 세 친구는 현태 딸의 생일잔치에 모이고 서로의 부모 제사에 모이고 자기가 해친 친구 어머니 장례에도 간다. 심지어 나중에는 현태가 전모를 알고 나서도 원망해야 할 인물의 빈소를 지킨다. 거기 안 가면 성립 안 되는 관계인 거다. 그리고 가족한테는 창피함 같은 게 있다. 내 식구가 남들 앞에서 뭐 하려고 들면 면박주고 부모님한테는 사랑한다고 말 못하면서 친구 부모님이 아프면 당당히 잘해드리고 상을 당하면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않나.
-종장에 이르러 연출이 멈칫거리며 어디서 끝낼지 망설이는 인상을 받았다. 감상성이 과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류 사장(최병모)의 동기, 현태와 인철의 동선이 명쾌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 더 아쉽다. =편집하면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에 집중하면서 포기한 디테일이 있다. 결말에 대해서는 감독으로서는 답을 갖고 있지만 배우들한테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각자 다르게 이해하고 있을 거다. 이를테면 현태가 인철에 대한 재규의 계획을 알고도 말리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결말부 현태의 표정이 갖는 의미가 정반대가 된다.
-영화를 놓지 못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좋은 친구들>은 내가 쓴 열한 번째 장편 시나리오인데, 이 영화를 포함해 스스로 인정하는 작품은 세편쯤이다. <좋은 친구들> 촬영 중에 착안한 영화도 있다. 그 영화들의 장르와 색깔은 다르지만 주제는 비슷하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관계를 유지하려면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 끈을 놓는 순간 비극은 쉽게 다가온다는 이야기를 영화로 하고 싶다. 물론 재미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