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객은 떠나지 않는다, 다만 판을 옮길 뿐이다. 90년대 <미학 오디세이>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비롯한 책들을 발표하며 미학자로, 정치논객으로 명성을 얻은 진중권이라는 이름은 ‘동양대 교수’라는 부연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고유명사다. 한동안 <씨네21>에서 미학 칼럼을 연재하며 트위터로 쉬지 않고 정치적 멘션을 이어가던 그가, 최근 팟캐스트를 두개 시작했다. 문화계 인사를 초청해 대화하는 팟캐스트 <진중권의 문화다방>과 정의당에서 만든 정치평론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 신간 <이미지 인문학>도 두권으로 펴냈다. 매체 환경 변화와 정치판에 대해 묻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정작 그의 관심사는 여느 저자와 같았다. “책이 좀 잘 팔려야 하는데. 이번에는 야심 있게 쓴 건데….”
-SNS에는 진보 성향인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다. 대선 이후, 그게 결국 찻잔 속 태풍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있어왔다. 꾸준히 트위터에서 정치적 사안에 대해 멘션하고 있는데 답답함이나 한계를 느낀 적은 없나. =원래는 대선 끝나면 그만두려고 했는데 졌다. 이겼으면 우아하게 그만두려고 했는데. 논객도 그만할 때 되지 않았나 싶었고. 하지만 투표하라고 독려해놓고는 졌다고 확 떠나버리면 무책임한 것 아닌가. 우리는 5천만분의 1만큼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 실망할 것도 없다.
-팟캐스트를 두개 하고 있다. 창비에서 하는 <진중권의 문화다방>(이하 <문화다방>)과 정의당에서 하는 <노유진의 정치카페>(이하 <정치카페>)다. 팟캐스트가 갖고 있는 대안언론으로서의 가능성이나 위험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기존 매체와의 차이는… 속성이 다르다고 본다. 기존의 영상매체는 문자를 기반으로 한다. 일방적인 것이다. 일인칭의 저자가 삼인칭의 주제에 대해 고독하게 독백을 하고, 독자는 책을 사서 남의 독백을 엿듣는 구조거든. 완성품으로 오기 때문에 칭찬을 하거나 비판을 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못한다. 그런데 인터넷 환경에서는 이미지든 영상이든 사운드든 올라올 땐 다 파일이다. 반제품이라 생각하고 거기에 뭔가를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파일을 다운로드받는 게 1.0이고 2.0단계에서는 업로드한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독자들이 기자가 되었고, 촛불집회 때는 독자들이 방송을 했고.
-그렇게 독자들이 비문자적인 매체로 옮겨간다. =옛날에는 정치에 대해 알고 싶으면 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치를 알고 싶으면 팟캐스트를 듣는다. 읽는 게 아니라 듣는다. 문자가 아니라 사운드다. 기본적으로 구술문화적인 팟캐스트는 기존의 문자 기반 텍스트와 그 성격이 다른 것이지 대안매체가 아니다. 많은 경우 팟캐스트는 오프라인 매체에서 나온 것을 기반으로 이야기하는 것이고 따로 취재를 하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쉬운 게 음모론이다. 팩트에는 구멍이 나 있기 마련이니 상상력으로 메워서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만들고, 청취자들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배후까지 내가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고.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가설은 틀릴 수도 있다고. 그걸 파타피지컬한 태도라고 하는데, 일부는 그걸 믿어버린다. 가상은 가상으로 받아들이되 진짜인 척해주는 것, 하지만 언제나 가상이라는 인식은 품고 있는 것. <정치카페>는 여러 팩트를 가지고 개연성이 가장 높은 해석을 하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판단은 청취자들에게 맡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방송이나 기존 매체를 무화시키는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독해력을 갖추고 있다면 그 판단을 하기가 용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팩트를 이어붙여 코멘트하는 형식에 쉽게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있지 않나. =어차피 플랫폼은 바뀌었다. 정보전달이 텍스트 기반에서 사운드, 이미지 기반으로 바뀌었다. 나는 디지털 사운드든 디지털 이미지든 그 아래에는 텍스트가, 프로그래밍이 깔려 있다고 본다. 그걸 읽지 못하면 미래의 문맹자가 된다는 내용으로 <이미지 인문학>을 썼다. 팟캐스트도 마찬가지다. 그 아래 깔린 프로그램 코드를 읽게 하는 방식으로 방송이 가야 하는데 그걸 안 하게 되면 남이 만든 이미지와 사운드를 현실로 착각하게 된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문자문화 이전의 구술문화, 영상문화가 아니라 문자문화 이후의 구술문화, 영상문화거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자문화 이후에 발전한 이성적인 분별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정치카페>는 노회찬 정의당 전 대표, 유시민 전 장관과 함께하고 있다. 그런데 세 사람이 정치적 지향이 같지 않다는 데서 재미가 발생한다. =나나 노회찬씨가 날세워 비판하고 있으면 유시민씨는 “나는 집권을 해봤기 때문에 안다”고 하면서 여당의 고충을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면이 객관성을 높여준다고 생각한다. 재미도 거기서 생겨난다. 노무현 정권 때는 유시민씨가 집권 여당이었으니 견제해야 했지만, 노무현 정권은 과소평과된 부분이 굉장히 많다고 본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한국이 IT 강국이 되었는데 지금 이게 뭔가 싶지 않나. 이명박 정부는 삽 들고 가서 산업사회로 돌려놨고 박근혜 정부는 상부구조까지 유신 시절로 되돌려놓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보수냐고 묻고 싶다. 보수는 과거로 가자는 게 아니다. 미래로 가는데 천천히 가자는 것이 보수라고.
-<이미지 인문학> 1권은 현대미술과 이미지에 대한 책이기도 하지만 정치에 대한 책으로도 읽힌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부분에서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쓰고자 했다.
-‘일베’에 대해 언급한 대목도 있다. “피라미드의 아래쪽에 위치한 계층은 ‘배제’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크다. ‘배제’당하지 않으려면 언제나 다수에 속해야 한다. 이 원시적 생존본능에서 소환되는 것이 바로 사회 절대다수가 공유하는 안전한 가지, 즉 애국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베에서 있었던 인증숏 붐은 어떻게 생각하나. =그게 문제다. 역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밖에. 전방 가면 북한이 대남방송에 “우리 고깃국에 쌀밥 먹는다” 그러거든. 그러면 우리는 매일 먹고 사는데 쟤들은 못 먹고 사나보다 하는 거지. 딱 그거다. 다른 커뮤니티와 달리 일베에서 그런 인증을 하면 “우린 이런 사람이 있어!” 하고 환호하는 게 보여주는 바가 있다고 본다.
-온라인 오프라인 할 것 없이 혐오의 문화가 점점 강해진다. 그것이 놀이라는 방식으로 소화되기도 하고. =계급대립이 첨예화된다는 얘기다. 일본만 해도 중산층 신화가 무너지면서 넷우익이 나오잖나. 일본 국민 90%가 중산층이라고 대답할 때는 그런 문제가 없다. 모두 주류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을 땐 문제가 없는데 경제적으로 안 좋아지니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이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극단적으로 해소하는 방식이 소수를 만들어 공격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소외됐다, 차별받는다는 느낌을 돌려줄 대상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가치는 애국이거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반국가적으로 몰아세우고 자신이 주류에 속해 있다는 심리적인 보상감을 받으며 자기가 평소에 받았던 소외감을 보복하는 것이다.
앞으로 심해지면 심해졌지 개선될 거라고 보지는 않는다. 사회의 양극화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의 구조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사람들이 톨레랑스를 갖기보다는…. 톨레랑스는 여유다.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공격점을 찾는다. 쉽게 말하면, 문제는 위에 있는데 위는 권력이다. 거기엔 저항할 수 없으니 쉽게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데 그게 소수자다.
-어떤 대책이 가능할까. =법적인 대항이 있으면 좋겠다. 증오발언(hate speech)을 처벌해야 한다. 인종차별, 성차별, 지역차별, 장애인차별 발언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없으니 기껏해야 명예훼손이니 모욕죄로 가는데, 개인을 특정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 쉽지 않다. 모욕죄 같은 건 없애도 되고 증오발언금지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독일 같은 경우는 동성애가 죄라고 가르치는 것이 불법이라고 헌법재판소에서 판결을 내린다. 머릿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목사가 있다 해도 공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증오발언금지법을 입법하면 된다.
-이번 서울시 교육감선거에서 고승덕 후보가 딸 캔디 고에게 사과하는 사진이 짤방으로 만들어져온갖 곳에 쓰인다. 만든 사람은 별 생각이 없는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어떤 정치평론보다 강력하게 사람들에게 어필했다. =직관적이니까. 텍스트로 모든 것을 이야기하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이미지는 공간적으로 투사된다. 고승덕이 뭐가 잘못됐는지 구구절절 얘기하는 게 아니라 한컷으로 보여준다. 핵심적인 것을 딱 짚어서. 그것을 읽어내는 게 디지털 시대의 독해력이다.
-현재 <씨네21> 연재를 쉬고 있다. 다음 개편 때 칼럼을 재개한다고 했는데.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다. 성에 관한 이야기다.
디지털 문맹이 되지 않으려면
<이미지 인문학> 1권의 부제는 ‘현실과 가상이 중첩하는 파타피직스의 세계’다. 문자 이후에 등장한 제2차 구술문화가 갖는 특징은 무엇일까, 이미지 아래 깔려있는 텍스트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의 문제를 다룬 책이다. 파타피직스는, 상상과 이성, 허구와 사실, 환상과 실재 사이의 단절을 봉합선 없이 이어, 가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론적 중첩의 상태가 발생하는 것을 일컫는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이미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세계에서 독자로서의 힘을 잃지 않는 법을 알려준다. 7월15일에 출간되는 <이미지 인문학> 2권에서는 디지털 가상이 갖는 섬뜩한 특성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