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구의 <우리 동네>를 무척 좋아한다. 서정적인 문장으로 빚어낸 <관촌수필>도 좋지만, 무엇 하나 속 시원할 것도 즐거울 것도 없는 ‘촌놈’들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담긴 문장 하나하나의 단맛을 쪽쪽 빨아먹고 싶은 건 역시 <우리 동네>다. 이를테면 “야늠아, 너 시방 워디서 담배 피는 겨? 너는 또 워디 가네? 저늠의 색긔들… 그래두 안 꺼? 건방진 늠 같으니라구. 너 깨금말 양시환씨 아들이지? 올봄에 고등핵교 졸읍헌 늠 아녀? 너지? 건방머리 시여터진 늠 같으니라구”처럼 펄떡펄떡 뛰는 말에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김운경 작가의 드라마를 보는 즐거움은 <우리 동네>를 읽는 재미와 비슷하다. <서울의 달> <파랑새는 있다>에서 서울 하늘 아래 모여든 남루한 인생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던 그가 JTBC <유나의 거리>로 돌아왔다. 등장인물의 태반이 전과자에, 연기 못하는 연기자 지망생, 비리로 이름난 전직 형사,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버거운 막노동꾼까지 갑갑하기 그지없는 인생들이지만 각자의 말을 가진 캐릭터들은 화려하지 않아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중에서도 왕년에는 날리는 건달이었지만 지금은 오갈 데 없이 퇴행성관절염으로 고생하며 ‘자유당 시절’ 추억만 노상 늘어놓는 장 노인(정종준)은 <서울 뚝배기>의 안동팔(주현)만큼이나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인다. 기초생활수급비로 간신히 지내면서도 한집에 세 들어 사는 젊은 처자 유나(김옥빈)에게 “나, 동사무소에서 돈 나오면 우리 맥주 한잔 허자”며 말을 붙이고, 싹싹한 총각 창만(이희준)더러는 자신도 얻어먹는 김치를 좀더 얻어다주겠다며 나름의 호의를 베푸는 이 영감님은 그저 오지랖 넓은 노인네라기엔 몹시 사랑스럽고 또 안쓰럽다.
살아 있는 캐릭터들은 스치기만 해도 서로에게 기운을 불어넣는다. 벽에 자유당 시절 모셨던 이화룡 형님의 사진을 걸어놓은 장 노인이 과거의 영광을 읊어댄 끝에 끼니 때우기도 고단한 현재를 자각할 즈음, “이화룡 선생님 참 잘생기셨다!”며 말을 돌려 장 노인의 기를 살려주는 창만의 한마디는 그의 성품을 그대로 담고 있다. 물려받을 재산은 없지만 도배는 잘하는, 직위는커녕 직업도 일정치 않지만 누가 봐도 ‘괜찮은 놈’이라 할 만한 남자의 매력이다. 그런 창만이 소매치기 전과 3범에 선머슴처럼 툭툭대는 유나를 좋아하게 되고, 역시 소매치기지만 “지갑을 털어도 현금만 빼고 나머진 다 우체통에 넣는 착한 애”인 남수(강신효)가 유나와 자꾸 마주치면서 각각의 관계들은 단단하게 영그는 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너무 순진한 판타지일 수도 있다. 집주인 한만복(이문식)의 콜라텍에서 상납금을 뜯으려던 조폭 망치를 장 노인이 때려잡아 사과받는 에피소드처럼. 하지만 그저 다세대 주택의 ‘옆방 사람’일 뿐인 인물들이 아웅다웅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이 작품에 어울리는 부제가 떠올랐다. ‘낭만에 대하여’.
+α
모두가 살아 있네
상납금 뜯으러 와서 홍계팔(조희봉)을 위협하던 건달들 중 한명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오자 낭랑한 독경 소리가 울려 퍼진다. 불교 신자냐며 반색하는 계팔을 향해 픽 웃은 건달이 말하길 “우리 엄마가 깔아노라 그래서 깔아논 거예요”. 지나가는 건달2에게도 엄마가 있고, 엄마는 아들을 챙기고, 아들은 귀찮아도 엄마 말을 듣는다. 이게 김운경의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