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가 스탭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90년대 말 격변의 시기를 거치며 결성된 영화인회의는 당시 공공기관이 미처 담당하지 못했던 자리에서 젊은 영화인들의 요구를 대변해왔다. 영화인회의에서 출발하여 현장 스탭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한국영화조수연대회의, 젊은 프로듀서들이 의기투합해 결성한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등 한국 영화계 각종 단체의 결성은 한 사람의 발자취로 이어진다. 바로 미인픽쳐스의 안영진 대표다. <몽타주>를 통해 기대되는 제작자 대열에 안정적으로 안착한 그가 차기작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영화계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부지런한 일꾼이던 그는 어떻게 믿음직한 제작자로 거듭났을까.
-5월12일에 미인픽쳐스의 차기작 <살인의뢰> 제작고사를 했다. =크랭크인은 15일부터 들어간다. 부산, 인천, 전주 등 전국을 거의 다 돌 것 같다. 아마 나도 같이 따라다닐 것 같다. 워낙 현장에 가는 걸 좋아해서 <몽타주> 때도 대부분 현장을 함께했다. 정작 스탭들은 불편해할지 모르겠지만. (웃음) 현장에서 영화가 만들어지고 스탭들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그게 제작자의 도리인 것도 같고.
-제작자가 되기까지 거쳐온 과정이 남다르다. =단체의 간사부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렀으니까 스스로 되돌아봐도 제작자가 된 과정이 평범하진 않다. 영화에 처음 관심을 가진 건 1994년 무렵이다. 당시 운동권 출신 중에 영화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마로’라는 단체가 있었다. 좋은 영화를 소개하고 간간이 직접 제작도 했던 모임인데 그러면서 영화쪽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96년에 플러스 엔터테인먼트라는 영화 홍보사에 들어가서 처음 일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제작 현장에 뛰어든 건 언제부터인지. =98년에 전국공공노동조합연맹에서 노동법 개악에 대한 반대 투쟁을 했었다. 그때 아는 선배가 일을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해서 함께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스크린쿼터 감시단도 발족되었는데 그쪽에서 공공연맹에 사람을 파견해달라고 연락이 와서 내가 차출되어갔다. 그렇게 노동법 개악 투쟁이 정리될 때 즈음 스크린쿼터 감시단과 영화인회의를 만드는 데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눌러앉게 됐다. 그게 99년 무렵이다. 그러니까 영화인회의 상근자로 근무하면서 영화계에 제대로 발을 들인 거라고 할 수 있다. 급하다고 일주일 정도 도와주러 간 건데 일주일이 석달이 되고 석달이 지금까지 온거다. (웃음)
-영화인회의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맡았었나. =90년대 말부터 2000년 초반은 영화계의 대체 세력을 만들어내던 시기였다. 젊은 영화인들이 이제 막 단체를 만들려던 움직임이 있었다. 영화인회의나 스크린쿼터 감시단은 출발은 선배들이 이끌었지만, 아직 안착되지 않았던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를 대신해 영화계 현안에 기민하게 대응해나가고 있었다. 젊은 영화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일종의 비상대책단체라고 보면 된다. <거짓말> 검열 문제, 해병전우회의 명필름 난입 사건 같은 굵직한 사건들에 대해 대처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 시스템에 대한 대응이었는데 내가 사무처장으로 있을 때 ‘비둘기 둥지 사태’가 일어나면서 제작환경개선위원회가 꾸려졌다.
-‘비둘기 둥지 사태’에 대해 좀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2001년에 일선의 영화 스탭들이 처우 개선을 주장하며 대종상 시상식장에서 직접 피켓을 들고 시위를 했던 사건이다. 스탭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싶다는 자발적인 피케팅이었다. 문제는 불만과 요구사항은 많은데 조직화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처음엔 외부인으로서 조합이나 협회를 만들라고 조언했는데 나중에는 뭔가 제대로 하려면 나도 그들의 일원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당시 영화인회의 이춘연 대표님에게 현장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우리 회사에 와서 일하라고 하셨고 그렇게 6개월 정도 씨네2000의 밥을 먹었다. 그런데 씨네2000에서도 제작하던 영화가 계속 엎어지면서 키플러스에서 제작되는 <거울 속으로> 제작부로 참여할 수 있게 다리를 놔주셨다. 단체 간사로 일했다고 좀더 신경 써주신 것 같다. 제작 현장에 제대로 발을 들인 건 그때부터다.
-한국영화조수연대회의(옛 4부조수연대)는 그때 만든 건가. 단체에서 일했던 경험이 토대가 된 건지.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지 하고 의도한 건 아닌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간사 일을 하면서 조직을 만들고 운영하는 노하우가 있으니 필요한 요구사항이 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게 맞는 건지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거울 속으로> 현장에 왔을 때 제작부협회를 만들었다. ‘비둘기 둥지’에서 출발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그룹별로 모아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요구사항이 뭔지를 정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논의 테이블이 만들어졌다. 연출, 촬영, 조명, 제작 이렇게 네 파트가 각기 목소리를 내는 4부조수연대는 현재 노조의 전신이랄 수 있으니 일종의 산파 역할을 한 거다.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이하 PGK)은 또 어떻게 만들어졌나. =내부적인 문제로 4부조수연대에서 제작부협회가 떨어져 나와서 지금의 PGK의 전신이 되었다. 당시 제작부협회 주체들이 막내스탭에서 점점 실장급으로 올라가는 상황이기도 했고. 그때 기획PD 모임이라는 소모임이 있었는데 프로듀서들도 네트워크가 없던 시절이라 우리끼리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는 필요가 제기됐다. 게다가 임금 단체협상이 논의되고 있는 상태라 이에 개별대응보다는 공동대응하는 게 좋다고 봤다. 준비과정부터 2년 반 정도 일을 했고 그러다보니 그 시기에 작품을 못했다.
-지나온 자리마다 조합이나 집단이 하나씩 만들어진다.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홍 반장 느낌이랄까. =그런 표현이 별로 달갑진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다. 딴 건 모르겠고 제작부협회 할 때 시스템 개선에 일정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은 있다. 도제 시스템을 깨고 개별 계약서가 필요하다는 취지에 대해선 다들 공감대가 있었고 각 영역에서 의견을 수렴해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부분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다가 지금은 거의 모든 스탭들이 개별 계약을 하고 있다. 노조 활동의 산파 역할을 했다고 할까, 큰 의미를 부여할 것도 없이 내가 영화계에 일조한 부분이 있다면 그 정도다. 제작부, 제작실장, 프로듀서, 제작자를 거치면서 서 있는 입장에 따라 필요한 목소리를 낸 것뿐이라고 해도 좋다. 다행히 나는 그때마다 효과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던 거고. 개인적으로 나는 한 사람의 제작자, 좋은 이야기꾼으로 보여지길 바란다.
-차기작인 <살인의뢰>에서도 다시 스릴러 장르에 도전하는데, 스릴러에 특별히 매력을 느끼는 건지. =이렇게 센 영화들만 만들 거면 왜 이름을 ‘미인픽쳐스’라고 했냐는 사람도 있더라. (웃음) ‘아름다운 여자’라는 의미의 미인이 아니라 ‘미디어를 만드는 사람들’의 약자다. 물론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도 있다. 특별히 스릴러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만드는 맛이 있어서랄까. 스릴러 누아르는 리얼리티가 중요한 장르다. 그런 게 재밌더라. 만들고 나서 보람도 있고. 코미디,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 주변에 스릴러 장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이야기들이 주로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살인의뢰>의 시나리오 초고를 직접 썼다고 들었다. =<살인의뢰>는 2009년 무렵 한창 PGK 일로 바쁠 때 착안한 이야기다. 그땐 바쁘긴 했어도 영화 제작을 하는 건 아니라서 목마름이 있었다. 노느니 글이라도 써보자는 마음으로 쓴 건데 2010년에 영진위 시나리오 마켓에서 추천을 받기도 했다. 초고는 70페이지 정보 분량에 감정만 있던 상태였는데 컨셉은 괴물에게 복수하기 위해 괴물이 되어가는 평범한 소시민 이야기였다. 그런데 하필 그즈음 <악마를 보았다>가 나오면서 그냥 자연스럽게 묵혀두게 됐다. 그러다 평소 알고 지내던 손용호 감독에게 한 번 풀어볼 수 있을지 제안했고 손 감독이 단선적인 이야기를 구체화하면서 지금의 시나리오 원형이 나왔다. 박성웅, 김상경, 김성균까지 이제껏 내가 했던 영화 중 가장 수월하게 캐스팅이 진행되면서 확신이 생기더라. 혼자 힘으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제작자, 감독, 작가, 배우까지 운명처럼 맞아들어갈 때 좋은 이야기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좋은 이야기가 좋은 프로젝트로 이어진다는 말이 인상적인데, ‘미인픽쳐스’를 만들게 된 계기도 같은 맥락인가. =PGK 일을 하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자고 해서 만든 게 ‘미인픽쳐스’다. 안훈찬, 이정환, 곽중훈 PD와 나까지 네명이 공동으로 지분을 가지고 회사를 만들었다. 창립 당시는 내가 <몽타주>를 제작하던 시기라 우선 대표를 맡았는데 지금은 네명이 모두 대표다. 중요한 건 공동대표가 아니라 각자 프로젝트를 가지고 움직이는 각자 대표라는 점이다. 계약서 서명부터 완성까지 프로젝트에 대해 각자가 책임을 지고 진행한다. ‘미인픽쳐스’라는 브랜드 안에 4개의 작은 제작사가 있는 거라고 보면 된다. 각자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게 다르니 따로 또 같이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상업영화도 하고 저예산영화도 하고 드라마도 하고 사회성 짙은 코미디도 준비 중인,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회사다.
-제작자로서 목표가 있다면. =나는 이야기꾼이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관객이 공감하고 감동과 재미를 주면 최고다. 물론 제작자로서의 첫 번째 미덕은 손해를 보지 않는 거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좋은 이야기가 먼저라고 생각한다. 내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익숙한 틀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 새로운 내용을 담아낼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개발하고 완성해나가는 게 목표다. 아직은 감독 중심의 제작이 대세지만 언젠가는 제작사 중심의 시스템을 갖추고 싶다고 할까. 궁극적으로는 ‘미인픽쳐스’라는 브랜드로 기억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제작부협회, PGK, 미인픽쳐스까지 결국 내가 관심이 있는 건 시스템을 만들고 정착시키는 거다.
-이를테면 미인픽쳐스는 워킹타이틀의 스릴러 버전이라 할 수 있을까. =스릴러는 한국영화가 강점을 지닌 장르라고 본다. 감독들도 그런 훈련이 잘되어 있고. 그렇다고 스릴러만 만들려는 건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데?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