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원고료라는 녹을 먹어본 많지 않은 경험 중, 이렇게까지 도대체 뭘 쓰지 하고 머리를 굴려본 적도 없었고, 굴렸는데 잘 안 돌아가서 절망한 적도 많았고, 기껏 굴렸는데 편집 단계에서 슥슥 바뀐 적도 없었고, 마감에 맞춰 보내놓고 잘릴지 말지 스트레스 받아본 적이 없었고, 이렇게까지 마음이 부서진 상태에서 영화를 보며 글을 만들어본 일도 없었습니다.
<마네킨2>를 다시 보다가, 갑자기 와락 울고 싶어졌습니다. 한없이 사랑스럽게만 느껴지던 마네킨 미녀 크리스티 스완슨이 천년 동안의 잠에서 깨어나 80년대의 新문물들을 보면서 내내 ‘amazing! I love 20th century!’라고 꽥꽥 소리질러대는 것을 보다가 갑자기 그녀의 텅 빈 플라스틱 주먹으로 뒷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아니, 고작해야 깃털침대, 샌드위치, 네온사인 따위를 보고서 저런 말이 저렇게 쉽게 나온단 말이야. 마치 늘 공부 안 해도 잘해서 부럽던 친구가 남 눈 몰래 열나게 단어장 외우는 광경을 목격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우아하고 도도하게 결혼 안 한다고 천명해서 멋지던 선배가 술취해서 실은 이번 이혼이 세 번째며 남자는 다 개새끼는 고백을 우연히 듣기라도 한 것처럼 순간 민망하기 그지없었던 것입니다.
아, 이 빈곤한 시대. 겨우 샌드위치나 펩시콜라에라도 의지해서 “난 행복해요!” 라고 떠들어야 되는 시대라니, 비록 증세의 말똥냄새는 안 난다 하더라도 말똥보다 더한 인간들이 있고, 콜라가 맛있어도 사실 그 콜라에는 엄청난 설탕과 카페인이 들어 있어서 곧 그대의 새하얀 치아도 치과 신세를 져야 할 텐데. 진정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여.
그토록이나 글을 쓰면서 굴착기 수준으로 삽질을 한 셈이지만,
황당하고 잡스런 헛소리를 하고, 정녕 그러한 취급으로 일생을 끝내더라도.
어른만은 되고 싶지 않다고, 그런 어른만은이라고 강렬하게 느꼈습니다
잠시 이빨의 즐거움을 위해 남을 아작꿀꺽할 수도 있고
발톱을 들어 상황을 자기를 위해 살살 조정하는
그렇게 할 재주가 없어서 언제나 지면에서 2cm 붕 뜬 인간은, 영화는
땅에서 아무도, 아무것도 잡아주지 않지만 하늘로 날기에는 뱃속에는 쓰레기가 꽉꽉
바람이 반쯤 빠진 채 너덜거리는 실꾸리에 묶인 시시한 풍선 같은 인간은, 영화는 철없는 채 영원을 퍼덕거리는 채.
언제나 우리는 흔하게 개무시, 개수작, 개나 줘버려, 개새끼란 말 잘하지만은
허나 개는 얼마나 정직합니까, 속이지 않고, 화가 나면 달려들고 밥을 주면 기뻐하고
개같이만 살 수 있다면, <개같은 내인생>만 살 수 있다면.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좋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릅니다만
사람의 마음을 1cm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창작자에게는 좋은 이야기일 거라고 짐작합니다. 이 졸필로 행여 단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움직인 적이 있다면, 그것으로 일백 퍼센트 행복합니다. <들장미 소녀 캔디>의 명대사로 마무리하죠.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어-
캔디가 훗날 테리우스를 다시 만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언젠가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으로 여러분을 만나뵐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nd of season, <Growing Up>김현진/ 21 the Suicide Blon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