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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도 볼 수 있도록 ‘상영운동’ 벌이겠다
이주현 사진 박종덕 2014-05-20

<60만번의 트라이> 박사유, 박돈사 감독

오사카조선고급학교(이하 오사카조고) 럭비부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60만번의 트라이>는 김명준 감독의 <우리학교>가 그랬던 것처럼 쉼 없이 관객을 웃기고 울린다. 박사유(왼쪽) 감독은 아픈 몸을 이끌고 3년간 럭비부 아이들을 쫓아다녔고, 재일동포 3세인 박돈사 감독은 박사유 감독의 손과 발 그리고 정신적 지주가 되어 영화 완성에 힘을 보탰다.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고 나타난 두 감독은 긴 시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재일동포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국경쟁부문에 출품된 <60만번의 트라이>는 제1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CGV 무비꼴라쥬 배급지원상을 수상했다. 국내에선 8월 개봉예정이다.

-오사카조고 럭비부 학생들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박사유_2010년, 유방암 항암제 치료를 막 끝냈을 때 오사카 재일동포 한분이 전화를 걸어왔다. 오사카조고 아이들이 (전국고교 럭비대회가 열리는) 하나조노 경기장에서 ‘큰일’을 벌이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거였다. 결국 오사카조고는 준결승에서 멈춰야 했지만 그때의 상황에 소름이 돋았다. 결승 진출이 좌절된 순간이었지만 응원하던 동포들은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고 아이들은 뿌듯하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더라. 같은 민족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어쩜 이렇게 긍정적이고 순수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이 광경을 나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웠다. 당시 몸이 안 좋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걸 다큐멘터리로 완성해야지 하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일단 촬영을 해놓으면 누군가가 편집해주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로 카메라를 들고 오사카조고로 향했다.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오사카조고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전혀 몰랐다고. =박사유_예전엔 교토에 살았다. 교토에서 오사카까지 두 시간 거리인데, 오사카조고에 도착하면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학생들이나 선생님들 보기엔 내가 이상했겠지. 그런데도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고. (웃음) 학교에 도착하면 여선생님들이 나를 숙직실에 데리고 가서 쉬게 해줬다. 그런 일이 잦았다. 처음엔 며칠 이러다 나아지겠지 했는데 호전이 없자 나중엔 나 자신이 너무 싫어지더라. 어렵게 재일동포사회에 허락과 협조를 받아 시작했는데 제대로 찍지를 못했으니. 김명준 감독님처럼 몸도 마음도 튼튼한 사람이 찍었으면 더 좋은 그림을 많이 담았을 텐데,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아픈 사실을 숨긴 건, 그들이 알게 되면 벼락 맞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런 감정이 끼어드는 게 싫었다. 서로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담고 싶었다.

-두분은 어떻게 만났나. =박사유_2008년 우토로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박돈사 감독은 책과 영화를 좋아하는 책방 점원이었고, 생전 처음으로 카메라를 사서 우토로를 찾았었다. 나는 항암제 치료로 머리카락이 빠져 두건을 쓰고 다닐 때였고. 그 뒤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느라 1년간 보지 못했는데, 마을 사람들을 통해서 박돈사 감독이 일년 넘게 꾸준히 카메라를 들고 우토로를 찾았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이 사람이라면 우리 동포들의 소식을 잘 전해줄 것 같았다. 이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맘 편히 죽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웃음) 이후 박돈사 감독이 우토로에서 촬영한 영상을 봤는데, 생각보다 훌륭했다. 이 사람이다 싶어서 함께 오사카조고 작업을 하자고 했더니 “전 책방 점원일 뿐입니다” 하고 도망가더라.

박돈사_상상도 못했던 제안이라서 그랬다. 재일동포 3세지만 일본학교 출신이라 조선학교뿐 아니라 재일동포 사회와 별 인연이 없었다.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생각해서 거절했다. 박사유 감독을 우토로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첫 만남에서 우리는 3시간 가까이 긴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 이야기,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이야기, 한국의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 이 세 가지가 대화의 주제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만남은 불가사의한 것 같다. 우토로는 재일동포 사회 속에서도 변경 중의 변경이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한국에서 온 여성과 그런 주제의 이야기를 나눴다니 말이다.

-두분이 만든 제작사 이름이 꼬마 프레스다. =박사유_조선학교의 초급부 남학생들은 예외 없이 모두 축구를 한다. 오사카조고 럭비부 아이들 역시 어릴 땐 축구를 했다. 촬영 협조를 받기 위해 작성한 기획서에 “여기 민족교육으로 다져진 혁명의 꿀벅지가 있다”라고 쓰기도 했다. 어쨌든 1년에 한번 열리는 꼬마 축구대회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럭비부 여름 합숙 기간과 겹치는 바람에 박돈사 감독이 대신 꼬마 축구대회에 갔다. 서점도 하루 쉬면서. 그날의 촬영분을 박돈사 감독이 직접 편집해서 DVD로 만들어 선수들의 부모들에게 나눠줬다. 박돈사 감독은 그걸 동네 마을 사진관과 같은 역할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집단이 아니다. 동포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이쪽(한국 사회)에 전해주고 싶은 마음 하나로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의 일이 언론으로서의 기능도 갖지만 그보다는 이 사회에 프레스(압박)를 가하자는 뜻이 크다. 작은 목소리, 낮은 시선이 우리의 모토다.

-내레이션에 “나와 조감독은”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감독 크레딧엔 두분 이름이 들어간다. =박사유_이건 우리 둘의 영화가 아니다. 야마가타영화제 때 상영된 다큐멘터리 <동일본 대지진 도호쿠 조선학교의 기록 2011.3.15-3.20> 역시 감독 크레딧에 우리 이름을 쓰지 말고 꼬마 프레스의 이름만 넣으려고 했는데, 그것과 마찬가지로 <60만번의 트라이>에서도 누가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꿋꿋이 민족성을 지키며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모습이다. 처음엔 이 영화의 감독 이름을 누구로 할 것인지를 두고 엄청 싸웠다. 서로 자기 이름 안 넣으려고. 사실상 이 영화는 박돈사 감독이 다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나는 촬영만 했지 그 뒤 내내 잠만 잤다. 몸이 회복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온순해 보이는 사람이 얼마나 왕고집인지. (웃음)

박돈사_이 영화는 한국에서 온 박사유라는 사람과 일본 땅에서 나고 자란 오사카조고 학생들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내레이션도 (박사유 감독의) 1인칭 시점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영화 작업을 계속할 생각인가. =박사유_<60만번의 트라이>를 끝내고 다시는 영화 안 한다고 그랬다. 영화가 이렇게 시간 들고, 돈 들고, 사람들한테 피해주는 건지 미처 몰랐다.

박돈사_카메라가 아니더라도 오사카 재일동포들의 기록 담당자로서 계속 힘쓰게 되지 않을까. 또 이 영화가 일본의 전국 극장에서 상영될 수 있도록 ‘상영 운동’도 계속 벌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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