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가 늘었다.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이 늘었다.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잠시잠깐 바둑을 두다보니괜스레 바둑 실력만 늘었다. <송환2>라는 큰 숙제와 한창 씨름 중인 김동원 감독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상황과 반복되는 고민들. 하지만 한시도 마음 놓고 쉬진 못한다. 그럴 수 없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꺾이지도 않는 굳건한 마음. 그 마음의 소리를 들어본다.
-<송환> 개봉 10주년 축하드린다. =지난해였는데? (웃음) 정식 개봉은 2004년에 했지만 첫 발표는 2003년에 했다. 지난해에 서울독립영화제나 서울아트시네마 등 몇 군데서 조촐하게 기념하는 행사도 가졌고 재상영도 했었다.
-다시 본 사람, 처음 본 사람 등등 다양했을 텐데 분위기는 어땠나. =특별한 기대는 없었는데 자원봉사했던 대학 1, 2학년 친구들이 재미있다고 해주니 이게 지금도 먹히는 이야기구나 싶어 뿌듯하기도 했다. 조창손 선생을 보고 울기도 하고 김선명 선생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는 학생도 있고. 살아 있는 반응에 기운이 났다.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은 요즘도 자주 만나나. 다들 어떻게 지내시는지. =죽어지내시지 뭐. 이명박 때는 전혀 기대도 안 했고 요전 대선에 2차 송환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걸었는데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이제는 말을 꺼내는 분들도 별로 없다. 조용히, 천천히 가라앉아 있다. 예전에는 그래도 북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라도 하셨는데 지금은 그마저 없는 게 더 안쓰럽다. 아무래도 10년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니까. 막상 카메라를 들고 방문해도 찍을 게 없고, 막상 찍고 나서도 답답함이 가시질 않는다.
-<송환>을 찍을 당시와 비교해보면 많은 게 바뀌었다. =그때는 상황도 역동적이었고 사건도 많았으니까. 지금은 2차 송환을 둘러싼 외부적인 변화도 있지만 시간의 무게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2차 송환 신청자가 33분인데 이미 10분이 돌아가셨다. 70대와 80대의 차이가 크다. 김영식 선생이 제일 막내인데 지난해에 팔순잔치를 하셨다. 아직 건강하신 편이지만 돌아다니는 건 힘들어하신다. 나도 <송환>을 30대 후반에 시작해서 40대 후반에 끝냈는데 어느새 육십이 다 됐다. 체력적으로도 많이 다르고 요즘은 눈이 침침해서 뷰파인더도 잘 안 보인다. 옆에서 도와주는 친구가 없으면 작업하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환2>를 찍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을 텐데. =사실 2편을 만들 생각은 별로 없었다. 2012년 대선 결과가 나오던 날, 선생님들의 얼굴이 너무 어두워서 그 표정을 보고 이 절망을 찍어야겠구나 싶어서 시작했다. 한데 지금은 절망이라기보다 무덤덤, 아니 자포자기에 가까운 것 같다. 여기저기 다른 시위가 많아서 그런지 시위도 뭔가 힘이 없어 보이고 막상 해도 열댓명밖에 모이시질 않는다. 어쩌면 관습적인 걸지도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전철역에서 구호도 외치고 그랬는데 이젠 고함이 들리지 않는다고 할까. 후원회 친구들도 50대가 넘어서 옛날 같지 않고 전체적으로 기운이 떨어졌다. 별다른 사건도 없어 큰 굴곡이 만져지질 않는다. 내내 일상만 찍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송환2>의 중심인물을 김영식 선생님으로 결정한 이유가 있나. =1차 송환 뒤 대표로 내세울 만한 얼굴이 필요하기도 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전주에 살고 계시던 김영식 선생님이 만남의 집으로 들어가셨다. <송환2>는 자연스럽게 김영식 선생님을 중심에 놓고 다른 분들의 사연을 함께 엮어가려고 했다. 워낙 농사일을 좋아하는 분이라 지금도 만남의 집에 가면 손바닥만 한 땅에 상추, 고추 같은 채소뿐만 아니라 사과나무도 심으시고 얼마 전부터 커피도 키우시더라. 예전보다는 기력이 많이 쇠하셨지만 그래도 아직 산을 타면 나보다 훨씬 빠르시다.
-작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어떤 부분인지. =애초에 구상은 김영식 선생님을 한축으로 하면서 아직 여기 남아 계신 분들의 일상을 담고 다른 한축으로 이분들의 영상 메시지를 북한으로 가지고 가는 방식을 생각했다. 스웨덴의 북한대사관을 통해 접촉했는데 입국이 어려워지면서 계속 대기 중이다. 원래 지난해 추석 때쯤 들어갈 수 있을 걸로 생각했던 게 봄으로 밀리고 이젠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 전보다 입국이 쉬워졌다고들 하는데 이번엔 유독 답변이 없다. 만약 북한을 못 가게 된다면 다른 분들의 사연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구성을 바꿀 수밖에 없을 것 같다. 2005년에 찍었던 상황들은 좀더 역동적이라 과거 이야기와 교차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예전 영상들을 찾아보니 안학섭 선생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좀더 비중 있게 키울 수 있을 것도 같다. 계속 고민 중이다. 고민하다가 바둑 두고, 바둑 두다가 고민하고.
-2005년에 찍어둔 영상들은 지금과 어떤 차이가 있나. =2005년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 시절에 2차 송환이 거의 이뤄질 뻔했다. 그때 재산도 정리하고 이혼까지 하면서 이쪽 생활을 정리하신 분도 있고. 당시에 촬영해놓은 영상이 적지 않다. 애초엔 과거와 현재의 비중이 3 대 7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러다가는 7 대 3이 될지도 모르겠다. 가능한 한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 싶지만 현재에는 긴급한 사안이 없다. 상황이 나를 쫓아다니게 만들어야 하는데 워낙 별일이 없으니 움직임도 없어진다. 너무 안녕해서 안녕하지 못한 상태다.
-완성 시점은 언제로 잡고 있나. =원래 계획은 올해 초에 끝내는 거였지만 그게 무너지고 나서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내년에는 안식년도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야 하니 어떻게든 내년 2월까지는 끝내야 한다. 처음엔 도와준다는 분들도 있고 나 스스로도 좀더 큰 이야기로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소박하게 끝내는 게 오히려 낫겠다 싶기도 하다. 짧게 에피소드나 후일담 형식으로 정리해주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가령 미나마타병을 세계에 알린 쓰치모토 노리아키 감독은 죽기 직전까지 작업을 했는데, 후반에는 미나마타에서 만난 사람 한명 한명을 30분 정도의 분량으로 끊임없이 담아냈다. 한때는 그런 방식이 너무 가벼운 것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그런 접근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시간과 세월은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다큐 작업에도 영향을 미치나보다.
-<상계동 올림픽. 그 후>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아직 소식이 없다. =그러게 말이다. 듬성듬성 촬영하고 준비하다가 활동력이 떨어진 것 같아 <송환2>로 전환한 건데 세월이 흐른 건 그곳이나 이곳이나 마찬가지더라. ‘상계동’ 역시 지금의 주민들 이야기만으로 끌고 가긴 힘들고 옛이야기가 더 많이 담길 것 같긴 하다. 사회가 전체적으로 변해가고 있으니 상계동 사람들도 거기에 적응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대해 내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거지. 머리가 복잡하다. 한때는 행당동, 봉천동 등등 해야 할 뒷이야기들만 준비해도 죽기 전에 다 못 끝내겠다 싶었는데 이제는 <송환2>라도 얼른 끝낼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미 벌여놓은 일들은 마무리해야겠지만 당장은 더 벌이고 싶진 않은 심정이다.
-많이 지친 것 같다. 그럼에도 다음 작품으로의 발걸음을 쉬지 않도록 하는 동력은. =당시에도 누차 말했지만 <송환>은 그간 찍어두었던 영상들이 여러 상황과 행운으로 맞물려 태어난 작품이지 온전히 내가 만든 영화가 아니다. 그 밖에 인연을 맺은 분들, 꼭 작품과 관계없어도 나에게 가르침과 힘을 준 분들에 대한 감사도 있고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부채의식도 있다. 사람… 사람인 것 같다. 미안함이라기보다는 애틋함이랄까. 늘 그런 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