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에서 이주노동자 추방 반대, 집회•결사의 자유 및 노동비자 등을 요구하며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꼬빌과 비두(왼쪽부터).
발신인 주현숙 감독 수신인 이주노동자 비두씨께 방글라데시 출신의 이주노동자. 2002년 4월28일부터 77일간 ‘집회결사자유 쟁취, 추방 반대, 노동비자 쟁취를 위한 명동성당 농성’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이주노동자의 인권 투쟁에 참여했다. 2004년 ‘전국비정규직 노동자대회’에서 연행되어 강제추방당했다
비두씨,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그 일의 의미를 바로 그 순간에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무리 준비해도 세상 사는 일은 매 순간 새로운 일이라서 예상을 빗나가게 마련이라 저처럼 순발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한참 뒤에야 어떤 순간의 의미를 알게 되기도 하고 어떤 순간은 기억에도 없이 사라지기도 하죠. 그래도, 아니 그래서 비두씨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몇몇 순간이 있어요.
처음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마석 가구공단에 드나들던 때였어요.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항상 너그럽고 부드럽던 비두씨가 저를 빤히 쳐다보면서 “현숙씨는 그것만 보여요?”라고 했을 때 좀 당황스러웠어요. ‘내가 보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인데, 저 사람에게는 보이는데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은 뭘까’ 궁금했어요. 그때 다른 경험이란 어떤 것인지, 그걸 이해하는 방법은 있기나 한 것인지 막막했어요.
또 다른 순간은 출입국관리소 앞 집회에서였어요. 관리소 직원들은 집회에 참석한 이주노동자들을 잡으려고 달려들고 한국인 활동가들은 이주노동자들을 보호하려고 막아서고 집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죠. 그리고 평소와는 달리 비두씨가 화난 모습으로 관리소 직원들과 몸싸움을 하고 있었어요. 그 모습이 낯설어 나중에 인터뷰할때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었냐고 물었죠. 비두씨는 수줍게 웃으며 얘기했어요. “내가 항상 그런 생각 있었어요. 언제 우리 이렇게 싸울 거야. 항상 도망만 다니고. 우리 도망만 다녔잖아요. 도망가다 다치고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잖아요. 그래서 나 꿈 있었어요. 맞서서 싸우는 꿈, 그때 내 꿈 이뤄진 거죠.” 들으면서 참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어요.
2003년 10월26일, 이삿짐을 옮기고 있는데 대신 촬영을 나간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전국비정규직대회에서 비두씨가 연행됐다는 소식이었어요. 전해 받은 촬영본에는 비두씨가 수많은 경찰에게 둘러싸여 팔이 꺾이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웃옷이 찢겨지며 연행되는 모습이 담겨 있었어요. 연행되면서도 비두씨는 “나 권리 있어, 나 말할 권리 있어. 이렇게 노동자 말할 권리 막는 나라, 어떤 나라야. 나 이 나라에 말할 권리 있어”라고 외치고 있었죠. 비두씨의 외침은 강했고 아팠어요. 목이 타들어갈 듯 아팠지만 그 순간 인터뷰할 때 했던 말들이 떠올랐고 비두씨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서 살았는지 알듯했어요. 그리고 이주의 경험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어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순간, 한국 사회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비두씨에게 달려든 경찰들의 많은 수로 알 수 있었죠.
다큐멘터리 만드는 과정은 끊임없이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인데 비두씨 덕분에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운 듯해요. 늘 잘해낼 자신은 없지만요. 그리고 요즘 새삼 느끼지만 모든 사람들이 입다물 때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비두씨 덕분에 알게 됐어요. 그래서 사실 이 말이 참 하고 싶었어요. 고마워요. 조금은 닮아 보려고 노력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