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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 표준계약서가 영화산업 상생의 길 이끌까

한국영화감독조합 조합장으로 보낸 1년, 이준익 감독

‘리퍼블릭 오브 시네마’(Republic of Cinema). 충무로에 있는 이준익 감독의 사무실 문에 크게 붙어 있는 문구다. 그 아래에는 타이거픽쳐스, 영화사 아침, 씨네월드, 세개의 제작사 로고가 나란히 있다. 제작사 3개가 모여 영화 공화국을 꿈꾼다는 뜻일까. 이준익 감독은 “영화 공화국이라는 단어를 붙인 지 오래됐다. 거창한 건 아니고, 따로 또 같이 영화를 만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는 그가 한국영화감독조합(이하 감독조합)의 조합장을 맡은 지 1년이 지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지난 1년 동안 그는 복귀작 <소원>을 만들었고, 동료 감독들과 함께 감독 표준계약서를 내놓았고, 한국영화산업전략센터(소장 최현용)와 함께 한국 영화산업 불공정 행위 모니터링 작업에 참여했다. 현재 그가 바라보고 있는 ‘한국영화 공화국’은 어떤 모습일까.

-감독조합장을 맡은 지 1년이 지났다. =조합장으로서 성실하지 못했다. 지난해 <소원>에 ‘몰빵’하지 않았나. 김대승, 변영주, 이미연, 정윤철 등 4명의 부대표가 불성실한 대표를 대신해 단체협약 같은 여러 사안들을 챙겨줬다. 사단법인 감독조합 원년에 나름 성실하게 임했으나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

-그럼에도 기획 및 개발 계약서와 연출 계약서 두 종류로 이루어진 감독 표준계약서가 나왔다. 감독조합의 숙원 사업이었다. =현장에 정착될 때까지는 좀더 많은 협상을 거쳐야 한다. 내일(3월26일)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와 감독 표준계약서와 관련한 2차 협의를 하기로 했다. 국회, 시나리오작가조합,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PGK), 촬영감독조합과 함께 표준계약서를 현실화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논의하기로 했다. 절차의 합리적인 계단을 밟기 위해 전 영화단체가 신중하게 접근하는 중이다.

-제협과의 2차 협의에서 다룰 주요 의제는 무엇인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감독 표준계약서를 준비하기 위한 자문위원회를 처음 소집했을 때 제협은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제협을 제쳐두고 다른 단체와 협상을 구체화한 뒤 그걸 가지고 제협을 압박하자는 의견이 감독조합 내부에서 나왔다. 하지만 조합장인 내가 반대했다. 4분5열된 영화계를 8분10열로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분4열’로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협에 새로운 제안을 했다.

-어떤 내용의 제안인가. =“제협은 왜 영진위가 주최하는 감독 표준계약서 자문위원회에 참석하지 않는가. 감독 표준계약서를 부정하려는 태도인가.” 이 질문을 들은 제협은 “그건 아니다. 각 단체가 30여개나 되는 사안을 두고 충돌할 텐데 제협 내부의 운영 현실을 고려했을 때 영진위가 진행하는 방식대로 따를 순 없다. 각 단체가 개별적으로 협상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제협의 회장단과 감독조합의 회장단이 만나 감독 표준계약서를 사전 학습한 뒤 이를 바탕으로 전향적으로 협의할 의지가 있는가”라고 다시 물었다. 그들은 “있다”고 했다. 내일 열리는 2차 협의가 바로 감독 표준계약서의 구체적인 항목을 놓고 논의하는 자리다.

-감독 표준계약서와 기존 계약서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감독이 저작권을 갖는 것이다. 대기업 투자배급사가 영화의 저작권을 가지는 게 지난 10년간의 관행이었다. =지난해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감독조합, 제협, PGK, 시나리오작가조합 등 4개 단체가 창작자 연대 같은 협의체를 마련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창작자 연대라는 건 위의 4개 단체가 영화의 저작권을 소유할 자격이 있다는 얘기다. 감독표준계약서 노철환 객원연구원이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일본의 사례를 참조해 한국의 감독 표준계약서 안에 저작권에 대한 내용을 명시했다.

-감독이 저작권을 가진다는 내용을 살펴보면 제작사는 감독에게 총수익의 최저 1.5% 이상에 해당되는 비용을 저작권으로 지불해야 한다. =현재 감독들이 받는 미니멈 개런티는 통상적으로 제작사 지분의 5% 정도다. 하지만 제작사가 폐업할 수 있고, 해당 영화를 둘러싼 여러 환경이 변할 수 있어 개인(감독)이 그때마다 저작권을 관리하는 게 어려운 현실이다. 그래서 감독에게 저작권이 주어져야 한다. 하지만 제작사 지분의 5%를 요구하는 건 비합리적이니 총수익을 기준으로 정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5%보다 훨씬 낮은 1.5%를 요구하는 건 투자자나 제작사의 저항을 없애고, 감독조합의 요구가 집단 이기주의로 비쳐지지 않기 위해서다. 물론 감독마다 개인차가 있기에 누구는 1.5%를, 또 누구는 15%를 요구할 수 있다.

-감독 표준계약서를 본 대기업 투자배급사와 제협의 반응은 어떤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얘기를 하면서 설득당하지 않으려고 하지. 베이스캠프에서 우리가 가진 정보를 설명하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해야 협상이 되는 것이다. 과거를 기준으로 오늘의 문을 열 것이냐, 미래의 기준으로 오늘의 문을 열 것이냐. 그게 감독 표준계약서의 선택이다. 분명한 건 자본과 창작자가 적절한 균형을 이뤄야 자본도 지속성 있는 수익 모델을 창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감독조합장으로서 한국 영화산업 불공정 행위 모니터링에 참여한 건 감독 표준계약서 문제도 걸려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단체장으로서 산업 발전을 위한 촉매제 같은 역할을 해야겠다는 의무감 때문인가. =두 가지 모두 포함된다. 현재 영화계 토론의 장으로 유효한 건 동반성장협의회 정도다. 하지만 제협의 경우, 최근에는 많이 바뀌었지만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동반성장협의회에 대해 불신을 드러냈다. 그 이유가 자본과 생산자가 공존하는 건 모순이라는 거다. 토론의 장이 마련됐는데 이 곳에서 우리의 정보와 생각을 교환하고 주장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본과 생산자로 구성된 협의체로서 동반성장협의회가 옳다고 본다. 최현용 소장이 이끄는 한국영화산업전략센터가 산업의 불공정 거래행위를 제대로 감시하지 않으면 그를 비난할 것이며, 모니터링 결과가 지나치게 창작자 입장에 서서 현실을 왜곡한다면 자본으로부터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지난 1년 동안 동반성장협의회에서 나온 스탭 4대 보험 가입, 영화의 최소 상영일수 보장 같은 내용들이 잘 이행됐다고 생각하나. =만족하지 않는다. 일단 극장이 공정 거래를 위한 노력을 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 노력의 이면에는 공정 거래를 저해하는 온갖 편법이 자행되고 있다. 그걸 본격적으로 논의하지 않는 게 불만이다. 그중 하나가 극장이 매주 부율을 편법으로 조정한다는 것이다. 그건 불공정 거래다.

-매주 부율을 편법으로 조정하는 건 개봉일을 기준으로 개봉 1주차에서 2주차, 3주차로 가면서 부율이 달라진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미국식 슬라이딩 부율 시스템이 멀티플렉스에 유리하게 이용되고 있다. 동반성장협의회가 가장 생색을 냈던 게 한국영화 부율을 기존의 50:50(배급사:극장)에서 55:45로 조정한 것을 두고 극장이 5만큼 양보했다고 얘기했던 것이다. 지금 멀티플렉스는 개봉 첫주 55:45으로 시작한 뒤 개봉 3주차부터 35:65로 변하다가 나중에는 손님이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20:80까지 가는 어마어마한 횡포를 부리고 있다. 하지만 최현용 소장은 이 문제를 동반성장협의회의 이행 사항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문제라고 지적하지 않는다.

-정부(모태펀드)와 창투사, 창투사와 창투사, 창투사와 대기업 투자배급사, 대기업과 투자배급사의 내부 거래(극장과 배급사)간에 이루어지는 돈의 움직임도 투명하게 관리될 필요가 있다. =투자배급사는 제작사와 계약할 때 제작 환경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대한 감사권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투명한 자금 운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촬영현장에서는 스탭들이 5천원을 쓰는 것까지 다 문서에 명시되는데 자본을 주로 다루고 있는 투자배급사는 마케팅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 왜 공개하지 않는가. 표준계약서라고 하면 지금까지 제작사와 여러 스탭, 배우간에 이루어지는 계약서를 얘기해왔다. 이제는 투자배급사와 제작사간의 투자 계약, 창투사와 투자배급사간의 투자 계약, 대기업의 내부 거래 역시 투명하게 노출되고 공개될 필요가 있다.

-최근 한국 영화산업이 동반성장을 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제협은 제협대로, 동반성장협의회는 동반성장협의회대로 각자의 입장을 내세웠던 점도 없진 않다. 그래서 산업의 여러 구성원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구심점이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감독조합장으로서 지난해부터 계속 영화계 담론의 실체가 없는 상태라고 지적해왔다. 씨네2000 이춘연 대표님이 영화인단체연대회의의 큰 어른이기 때문에 나서야 한다고 얘기했지만 그분은 “그만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협이 산업의 맏형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제협 이은 회장한테 제안했다. 하지만 제협회장단이 바라보는 영화계 전체의 맵과 다른 단체장들이 바라보는 맵이 현재로서는 다르다. 같은 지도를 놓고 버스가 갈 수 있는 노선을 정해야 버스에 다 올라탈 수 있는 거지, 다른 지도를 놓고 노선을 정하는 건 거짓말을 하는 것이거나 정보 부족으로 오판을 하는 거잖나. 이 얘기를 제협과 회의할 때마다 얘기하고 있다.

-얼마 전, 스모모픽쳐스(대표 이봉우)가 제작한 일본영화 <인 더 히어로>에 출연한 얘기도 해보자.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한국 감독을 연기했다고 들었다. =임필성 감독이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에 출연했던 나를 추천한 거다. 나 역시 비중이 커서 도망가려고 했으나 촬영이 임박해서 거절할 수 없었다. 대타로 떠밀려 나가 벌선 케이스지. (웃음)

-캐릭터 준비도 했나. =필요 없었다. 영화감독 역할이라 현장에서 내가 하는 거 그대로 하면 되니까.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 =감독과 이봉우 대표에게 칭찬받았다. 투 테이크 안에 다 오케이 받았다니까.

-차기작 준비로 바쁘다고 들었다. 어떤 작품인가. =<사도>. 사도세자 이야기다. 영조, 사도세자, 정조로 이어지는 60년에 걸친 ‘대설’. ‘소설’이 아닌 대설.

-왜 사도세자인가. =원래 다른 아이템들을 여럿 개발하고 있었다. 최근 고바야시 마사키의 <할복>(1962)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큰 영감을 받았다. 현재와 과거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사실보다 진실을 추구하는 플롯을 발견했다. 기록은 사실을 남기는 거라지만, 그 기록조차도 과연 사실일까라는 의심은 항상 창작자들에게 좋은 힌트가 된다. 사도세자는 그리스 로마 신화, 셰익스피어의 어떤 비극보다도 훨씬 참혹한 비극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이야기는 많지만 아버지(영조)가 아들(사도세자)을 죽인 이야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영조와 정조 시대를 그린 이야기 대부분이 사도세자를 대상화한다. 사도세자를 주체적으로 그려내는 게 이 영화를 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다.

-진행은 어떻게 되고 있나. =쇼박스가 투자배급을 하기로 결정됐다. 이제 캐스팅에 들어간다.

-지금까지 나온 이준익의 영화 중 가장 어두운 작품이 될 것 같다. =어둡지 않다. <왕의 남자>가 그랬듯이 <사도> 역시 희극적 표현을 통해 비극에 이르는 작품이다. 비극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인간 내면의 본질적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조만간 공개될 날이 오겠지만 현재 나와 있는 감독 표준계약서는 기존의 계약서에 비해 명료하고, 세세하고, 합리적이다. 무엇보다 산업의 생태계 안에서 감독의 권익을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하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현장에 안착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특히 감독이 저작권을 갖는다는 제12조(저작권 귀속 및 독점적 이용허락)와 제13조(독점적 이용 허락에 대한 대가)는 대기업 투자배급사와 제작사들의 이해와 동의가 필요한 조항이다. 이해관계는 다르지만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함께 달려가는 이준익 감독이라면, 감독 표준계약서의 현장 안착이 무모한 바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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