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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이라는 산에 오르기 위한 가이드북
송경원 2014-03-25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임권택, 정성일 지음 / 현실문화연구 펴냄

감독은 미지의 산이다. 그 속에 완성된 하나의 생태계를 품고 온갖 풍경을 보여주지만 직접 발을딛기 전에는 숨겨진 비경까지 볼 수 없다. 그러나 거장이라 불리는 감독일수록, 산은 높고 길은 험해 그 세계에 발 들일 용기가 쉽게 나지 않는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좋은 가이드다. 매번 같은 길만 오르락내리락하던 나를 다른 길로 이끌어줄, 이 산을 좀더 잘 알고 자주 다녀 산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사람. 한국 영화계에는 임권택이라는 거대한 산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임권택을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동시대에 함께 호흡하는 감독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과장해서 말하자면 정성일이라는 좋은 가이드 덕분이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는 우리가 거장이라는 이름 아래 묻어버린 임권택의 모든 것을 발굴해낸다. 그렇다. 이 책은 감히 ‘모든 것’이라 말할 만하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는 임권택에 대한 감독론이자 수필이며, 인터뷰인 동시에 자서전이다. 감독 임권택의 작품을 설명하는 해설서인 한편 한국 영화사의 한 줄기에 대한 꼼꼼한 기록이기도 하다. 많은 인터뷰어들이 대부분 거장의 그림자에 기대 쉽고 빤한 길을 안내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아는 길을 다시 걷기 위해 이 책을 집어든 것이 아니다. 길게 난 대로 옆 사이사이 좁은 오솔길, 그 옆에 핀 들꽃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 굳이 감독의 말을 ‘듣는다’. 그런 방면에서 인터뷰어로서 정성일 평론가는 탁월하다. 그는 임권택 본인도 잊고 있던 에피소드까지 빠짐없이 훑어 걷어올린 뒤 시대순으로 차곡차곡 정리한다. 질문을 주고받는다기보다는 거의 취조에 가까운 집착으로 대상을 파헤친다. 아마도 대부분의 감독과 배우에겐 이같은 방식이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이는 임권택이기에 유효한 집요함 혹은 꼼꼼함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인물을 역사 속에 집어넣어 해석하는 대신 그 자체가 한국 영화사인 사람을 선택했다. 그리고 본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거의 모든 정보를 채워넣는다. 2권, 1200쪽에 걸친 방대한 분량의 문답은 임권택이 걸어온 길이자 한국영화가 쌓아온 시간과 진배없다.

임권택은 ‘한국영화의 거장’이다. 사실이다. 하지만 높은 산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 이러한 수사에는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다. 이러면 마치 그의 모든 작품이 위대해야 할 것만 같지 않은가. 이 책을 읽고 난 뒤 거장이라는 헌사만 남발한 자들에게 뭐가 그리 급해 이렇게 많은 것을 생략해야만 했는지 묻고 싶어졌다. 책을 읽다보면 아흔여덟편의 영화 중(이 책이 나올 당시까지의 기록이다) 실패한, 감독 스스로도 졸작이라 부르는 영화들이 더 흥미롭다. 독자들이 궁금한 건 그 질곡의 과정이고, 정성일 평론가는 “기나긴 대화를 통해 임권택과 독자 사이를 중재”한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이 ‘중재’라는 단어가 참 좋았다. 이제 곧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가 나온다. 심지어 이번엔 정성일 평론가가 그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찍고 있다고 한다. 보고 듣고 말하고 찍는 것까지 더해져, 임권택을 말하는 인터뷰집이 다시 한번 더 나오길 간절히 희망한다. 아니, 응당 그래야 한다. 이제 임권택과 정성일이라는 짝은 한국영화의 의무가 되었다. 찍는 눈과 말하는 입. 한국영화라는 진경산수화.

당신이 당장 위의 책을 읽을 수 없다면, <마틴 스코세이지와의 대화> 리처드 시겔 지음 / 이태선 옮김 / 비즈앤비즈 펴냄 를 추천합니다

임권택에 관한 애정과 집요함으로 이 책을 따라올 책은 없다. 있다면 정성일이 앞으로 쓸 임권택 감독의 다음 인터뷰집뿐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임권택 감독을 알고 싶은 거라면 차라리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사이트(www.kmdb.or.kr)에서 연재 중인 칼럼 ‘임권택 x 101; 정성일, 임권택을 새로 쓰다’를 추천한다. 임권택 영화 101편 중 현재 영상자료원에 필름으로 남아 있는 71편을 대상으로 2012년 말부터 현재까지 연재 중이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찰떡궁합을 느껴보고 싶다면 리처드 시겔의 <마틴 스코세이지와의 대화>도 나쁘지 않다. 대상에 대한 성실함과 정직한 인터뷰의 힘이 어쩐지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