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극이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를 제치고 TV 미니시리즈의 단골 장르가 된 지 꽤 오래다. 억울함에 대한 대중적 공감을 출발선으로 삼고, 원한에서 비롯한 추진력으로 사적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도모하는 복수극의 주인공들은 초기엔 주로 죄 없는 희생양이 된 아버지를 대신해 심판에 나섰다. 그리고 장르가 반복과 깊이를 더해가는 동안 그들은 복수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악한 아버지와 대면하는 지점에 도달했으며, 돈이나 권력의 상징인 아버지들의 자리를 노리거나 사회적으로 고발하는 등 부조리의 원인으로 구세대를 지목하고 맞서는 중이다. 복수극으로 인한 냉소와 허무 끝에서 몇몇 드라마들은 무기력한 주인공이 재활하고 가족을 되찾는 이야기를 내놓았고, 사적 복수에 눈이 먼 자가 만들어낸 희생양의 가족으로 시점을 옮겨, 다시 사법 시스템을 통한 구명의 절차를 짚기도 했다.
어쩌면 복수를 테마로 한 이야기에서 뽑을 수 있는 단물은 다 빠진 게 아닌가 싶던 이즈막에 KBS 드라마 <태양은 가득히>는 딱히 새로울 것 없이 근작들의 설정을 반복한다. 아버지를 만나러 타이를 방문한 정세로(윤계상)는 아버지 일당의 사기극에 휘말린 보석딜러 공우진(송종호)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된다. 교통사고를 당한 아버지의 수술비도 빼앗긴 그는 타이 감옥에서 5년간 형을 살고 출소해 국제적인 보석딜러 이은수로 신분을 바꾸고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한 주얼리 회사 벨라페어의 대표 한영원(한지혜)에게 접근한다. 한편, 영원은 아버지가 약혼자 살해를 지시한 흑막이란 걸 모른 채 정세로를 원망해왔다. 누명과 옥살이, 아버지의 죽음, 신분세탁, 어긋난 복수, 선대의 욕심으로 팔자가 꼬이는 자식들까지. 워낙 자주 반복되는 설정이라 드라마를 좀 보는 이라면 절로 ‘또냐?’ 하는 소리가 나올 법하다.
타 장르를 결합하거나 극 구성으로 서스펜스를 더하는 최근 복수극의 경향에 비하면, 다소 늦게도착한 드라마가 아닐까 싶을 정도. 그리고 구태의연한 이야기들이 종종 배신을 꾀하듯, <태양은가득히>의 정세로는 시작부터 냉철한 복수자들의 궤도를 이탈한다. 죄를 심판하고 집행하는 그날까지 서늘한 눈동자 아래 증오를 감추는 복수자들의 내면은 대개 그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만이알아채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세로는 여봐란 듯이 울분을 줄줄 흘리고 대놓고 이죽거리는 통에 그의 고용주 한영원을 비롯한 벨라페어의 직원 모두가 이상함을 감지한다.
자신의 조력자들까지 불안해할 정도로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세로는 그를 제지하는 박강재(조진웅)를 향해 한껏 빈정거린다. “형, 형은 내가 그 사람들한테 참아주고 웃어주고 아양 떨어가면서 복수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렇게 따지면 복수의 대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기능을 공부하고 출소한 뒤, 실기를 갈고닦아 그 앞에서 뽐내는 것부터가 ‘에러’였다. 도망칠 수 없는 덫을 놓고 숨통을 조이려는 목적에 맞게 증오를 숨겨두지 않는다면, 신분세탁도 불필요한 행동이다. 그는 어째서 정체를 들키길 바라는 사람처럼 감정을 흘리는 걸까?
<태양은 가득히>의 극본은 복수하는 이를 냉철한 심판자의 자리에서 ‘대체 당신들은 나에게 왜 그랬는가?’ 해명을 원하고 ‘정말 그렇게 나쁜 사람들인지’ 확인하려는 연약한 인간의 자리로 이끈다. 흑막을 오픈하는 전개는 빠르지만, 통쾌한 복수와는 거리가 멀다. 사납게 포효하다 어쩔 줄 몰라 질척거리고, 심지어 복수의 대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남자. 그가 복수극의 끝물에서 멜로로 회귀할지, 혹은 복수 다음의 땅을 밟을지가 궁금하다.
+ α
복수자들의 헤어스타일
영화나 드라마 속 인민군 역할이 까칠한 수염을 깎지 않는 것처럼, 새로운 신분을 얻은 남자주인공이 앞머리를 넘겨 이마를 드러내는 것은 복수극의 클리셰다. 얼마 전, 이를 깬 KBS 드라마 <상어>의 한이수(김남길)가 앞머리를 올리는 대신 콧수염을 선택했으나, 많은 복수자들은 순진했던 시절과 작별하고 전의를 다지듯 앞머리를 걷어올린다. 그리고 <태양은 가득히>의 정세로는 머리도 올리고 수염까지 길렀지만, 그 이마 아래의 눈동자는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다친 짐승처럼 불안하게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