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내 주위에서도 불륜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던 A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상하게 덤덤한 얼굴을 했던 건 사실 너무 놀랐기 때문이었다. 현실은 의외로 KBS <사랑과 전쟁> 혹은 주말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천박한’ 불륜남녀와 닮아 있지 않았다. 평범하고 점잖은 그들에겐 현실의 벽을 불사를 만큼 열렬한 로맨스도 드라마틱한 이별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는 자연스레 알려졌고 힘없이 무너져 흐지부지 끝났다. 처음부터 그들의 관계를 몰랐던 사람이라면 영원히 모르고 지낼 만큼 겉으로는 변한 게 없었지만 가끔 생각한다. 그렇게 상처를 주고받은 사람은 그 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무것도 그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들은 도대체 무엇과 싸우고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이 혼란스런 주제에 대한 답에 가장 성실하게 접근한 드라마는 <사랑과 전쟁> 첫 시즌을 썼던 하명희 작가의 SBS <따뜻한 말 한마디>다. <사랑과 전쟁> 집필 당시 취재 과정에서 “누가 봐도 이혼이 답일 것 같은데 헤어지지 않는 사람들, 힘들고 괴로워도 살아내야 하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그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바로 그런 사람들의 삶에 대해 그린다. 능력있는 사업가 남편 재학(지진희)을 비롯해 가족을 돌보는 것만이 자신의 몫이라 여기며 완벽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온 미경(김지수)은 남편의 외도에 충격받고, 그 상대가 역시 유부녀인 은진(한혜진)이라는 데 더욱 분노한다. 캠퍼스 커플이었던 첫사랑 성수(이상우)와 결혼에 성공해 아이를 낳아 기르느라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은진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남들 보기에 딱히 모자랄 것 없는 삶을 사는 여자다. 그러나 은진 역시 5년 전 남편이 부하 직원과 바람 피운 걸 알게 된 뒤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고 괴로워하는 중이다.
불륜을 다룬 수많은 작품과 달리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은진과 재학의 ‘운명 같은 이끌림’이나‘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마음’처럼 애틋한 로맨스는 생략된다. 그렇다고 이들이 남편보다 잘나가는 남자 혹은 아내보다 어린 여자에게 눈이 멀어 살림을 거덜내고 천륜을 저버릴 만큼 극악무도한 인간들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아내이자 남편, 부모이자 자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다하면서 일상을 살아가며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아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러나 행동에 대한 대가로 그들은 둘만의 비밀인 줄 알았던 관계가 가족과 친구와 이웃에게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광경을 맨 정신으로 지켜봐야 하고, 은진의 동생 은영(한그루)과 재학의 처남 민수(박서준)의 사랑을 망가뜨렸다는 죄책감을 감당해야 한다. 재학과의 만남을 끝냈다고 생각했음에도 생각지 못한 방향에서 계속 번져오는 불행에 “내가 무슨 전염병 환자 같다”라며 몸서리치는 은진에게서는 화끈한 권선징악 구도보다 서늘하게 파고드는 성찰의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야기는 파경으로 치닫는 대신 평온해 보이던 일상이 무너진 뒤 서로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두 부부를 통해 이혼이냐 재결합이냐의 선택보다 중요한 고민의 방향을 제시한다. 지나친 낙관 혹은 계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사람에게서 희망을 보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은진은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사람으로 치유되지 않더라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 힘들고 괴로워도 살아내야 하니까.
+ α
‘망고 처트니’ 시모 잡는 안나의 말 한마디
“말은 해야 맛이고 고기는 씹어야 맛”이라며 며느리 미경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미운 소리 툭툭 뱉는 낙에 살던 추 여사(박정수), 하지만 입에 딱 맞는 음식 해다주며 “어머닌 외모에 비해 마인드가 확 떨어지시는 것 같아요”라며 일침 가하는 쿠킹 클래스 강사 안나(최화정)보다는 한수 아래다. 어른한테 막말한다며 파르르 떨어봐야 “말은 해야 맛이라는 말씀에 감명받았어요. 저도 그래도 되죠?”라는 역공이 남아있으니, 진상 상전들 때문에 울화병 걸릴 것 같은 이들은 참고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