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선수의 새 쇼트프로그램 곡목을 듣고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어릿광대를 보내주오’라는 제목이 혹 어릿광대에 비유한 자신을 떠나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뜻이 아닐까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스티븐 손드하임 작사/작곡의 뮤지컬 넘버 <send in the clowns>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확신했던 남자의 마음이 자신과 같지 않음을 알게 된 여배우가 자신의 상황을 타이밍이 어긋나 망쳐진 무대에 비유하고 이를 수습할 어릿광대를 호출하는, 쓸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뭘 표현할지는 그녀의 몫이지만, 그간 얼음 위에서 보여준 다양한 모습을 회상하며 그제야 염치없이 감탄사를 보탰다. 그리고 기왕이면 다시 금메달을 따는 편이 그녀에게 더 좋은 일이리라 생각했다.
소치동계올림픽으로 은퇴를 앞둔 그녀의 지난 경기 영상이나 다시 봤으면 하던 차, 마침 설 연휴중에 방송된 다큐멘터리 <김연아, 챔피언>(KBS)은 이제껏 그녀를 다뤘던 어떤 다큐보다 담담한 톤으로 오직 김연아 개인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국내 대회에서 마지막 점검을 하는 일정 사이사이, 지난 선수생활 영상을 시간순으로 배치하고, 소치의 의미를 홀가분한 마무리에 두는 인터뷰 끝에 그녀의 특장인 트리플 콤비네이션 점프를 다시 역순으로 편집한 구성. 원하던 목표를 달성했고, 더이상 외부의 누군가와 경쟁하는 데서 의미를 찾지 않는 전 올림픽 챔피언에게 라이벌을 들이대거나 금메달을 채근하는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김연아, 챔피언>은 끝없는 도전과 경쟁을 상찬하는 일반적인 스포츠 다큐와는 정서가 달랐다. 신통치 않은 비유를 들자면, 하산하는 이의 등을 보는 기분이랄까. 흥미로운 구성에 자극을 얻어 김연아를 다룬 다큐와 특집방송을 시간순으로 다시 보기 시작했다. 고독하게 훈련하던 재능 있는 소녀가 열악한 조건과 부상에도 불구하고 월등한 환경에 있는 일본 라이벌을 제치고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우승한 스토리를 골조로 하는 2007년 <종달새의 비상>(KBS)이 가장 익숙한 스타일의 스포츠 다큐였다면, 그 이듬해 SBS <소녀, 세계를 매혹하다>는 첫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매력이 폭발한 쇼트프로그램 <록산느의 탱고>로 문을 연다. 그녀의 경기를 중계하며 마치 산타처럼 ‘호우~호우~호우’ 하고 감탄하는 미국 해설자나 ‘저같이 불평 많은 노인도 이것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브라보!’라고 낮게 읊조리던 러시아 해설영상은 이후 김연아 다큐에 빠지지 않는 요소가 된 외부의 시선과 평가를 압축한다.
복장 터지는 국내 해설에 만족하지 못한 피겨 팬들이 해외 영상을 해석하고 공유했던 것이 시작이나, 많은 수의 다큐들이 제대로 된 기술 분석이나 피겨계의 동향을 짚는 대신에 김연아에 대한 간증을 수집해 나열하는 게으른 반복을 이어갔다. 예능을 제외하고도 국내 다큐만 스무편이 훌쩍 넘지만 저 두편의 영상을 재편집한 것들이 대다수이다. 한/일 라이벌 구도에 치중하는 방송은 급기야 아사다 마오 선수의 단골 중화식당에서 그녀가 즐겨먹던 볶음밥을 먹는 노인의 코멘트를 따는 촌극을 벌였다. 시간순으로 훑어온 다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소녀, 세계를 매혹하다>에서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의 인터뷰 중 김세열 코치가 전화를 해 “어떡하면 그녀가 행복한 스케이터가 되는지 물었다”라는 대목이다. 전에는 정상을 목표로 한 과정이 행복하길 바랐고, 저 말을 다시 되짚는 지금은 목표를 이룬 뒤의 인생 역시 그러하길 바란다. 마지막 경기를 끝낸 그녀의 미소가 후련하길, 부디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경기가 되길. 메달에 대한 조바심은 <김연아, 챔피언>을 리플레이하며 떨치련다.
+ α
음악도 훌륭해
<김연아, 챔피언>의 배경음악은 시청하는 이의 감정을 상투적으로 고양하지 않으면서도 다큐의 입장과 시선을 읽을 수 있는 탄탄한 지문 역할을 해낸다. 공항에서 카메라 기자들이 벌이는 무례한 소란을 관조하기도 하고, 보사노바 가수 엘리스 레지나의 <Sai Dessa>와 선수의 연습 영상 호흡을 절묘하게 맞추기도. 특히 김연아 선수의 현재에서 시작해 7살 무렵으로 시간을 돌리는 마지막 트리플 콤비 점프 모음에 붙은 토킹뉴 & 비니시우스 버전의 <Tristeza>는 애잔한 듯 담담해서 여운이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