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충무로 중고 상점에서 구입한 라이카 M6 카메라. 지난 10여년간 분쟁지역으로 머나먼 여정을 떠난 박노해 시인의 가장 좋은 벗이다. 2003년 이라크 전쟁터로 떠난 박노해 시인은 그동안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 아시아 등 가난이 존재하는 다양한 지역에서 평화활동을 이어왔다. 그런 그가 아시아 지역 민초들의 삶을 조명한 사진전 <다른 길>을 3월3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한다. 그의 사진에 대한 물음은 종종 삶의 본질에 대한 답변으로 돌아왔는데, 그건 박노해 시인이 카메라를 들게 된 이유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였다.
-3년 전의 사진전 <라 광야>와 <나 거기에 그들처럼>에선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중남미의 분쟁지역을 두루 조명하셨습니다. 이번 사진전에선 아시아에 주목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세계의 분쟁지역을 돌다보면, 아시아엔 ‘안아주는 힘’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른 지역의 어머니들도 인자하고 좋지만, 중동 지역의 어머니들은 강인하시거든요. 그런데 아시아 여성들은 달라요. 동네에서 며칠 지내다보면, 달걀 삶아서 싸주시고, 동구밭까지 나와서 눈물 흘리며 배웅하고. 우리네 할머니들과 똑같거든요. 아시아엔 그런 치유의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곳’으로 길을 떠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곳은 어떻게 찾아가시는 건가요. =나라는 정말 인연 따라 가는 것 같아요. 저는 일부러 어느 나라를 꼭 가야겠다, 프로젝트 추진하듯 떠나지 않거든요. 그렇게 어느 나라에 가게 되면, 그 나라 삶의 세 가지 기둥을 찾습니다. 예를 들어 팔레스타인에 간다고 하면, 그 나라에 대한 온갖 서적은 분쟁에 대한 내용밖에는 없습니다. 그 지역 전문가들과 토론을 하다가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데 너희들, 수천년 동안, 수백년 동안, 뭐 먹고 살았니? 이런 전쟁통에서. 그렇게 물으면 소위 운동권 지식인들은 당황하죠. 한번도 생각을 안 해봤거든요. 우선 전통적 토박이 삶이 오래된 동네가 어디냐고 물어 무작정 가보는 겁니다. 터덜터덜 길을 걷다보면 드디어 로마 때부터 심었던 싱싱한 올리브 나무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죠. 그렇게 민초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쭉 훑고, 시민사회 운동을 보고, 각 분야 전문가와 지식인들은 가장 나중에 만납니다. 그렇게 역순으로 찾아가는 겁니다.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은 지역을 주로 찾아가셨는데, 그런 지역의 주민들과는 어떻게 소통하십니까. =인도네시아만 해도 각 부족의 언어가 수천개는 되거든요. 통역사를 세명 데려가도 다들 국가의 대표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에 통역이 안 돼요. 그런 상황에서는 제가 가장 선수죠. (웃음) 한국말로 “아이고 어머니, 이거 감자예요, 고구마예요?” 하면 금세 알아듣습니다. 먹는 시늉을 하면 “아이고, 그거 먹지 마. 귀한 사람이…” 하며 깎아서 주기도 하시고. 제가 가장 가난한 농촌에서, 또 험한 밑바닥 생활을 하며 얼마나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겠어요. 그런 곳에서 살면서 얻은 ‘현장 지성’이 발동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곡괭이질하며 수로 작업을 하고 있으면 참여하고, 와서 밥 먹으라고 하면 부엌불도 같이 때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식구가 되어 있죠. 그렇게 마을 사람들에게 스며든 다음 사진은 나중에 찍습니다. 저는 사진이 목적이 아닌 사람이니까요.
-역광으로 찍은 사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작고 여린 존재에 본능적으로 애정이 가는 것 같아요. 산길을 걷다가도 아침저녁의 순광으로는 거대한 나무나 아름드리 바위나 명승지만이 빛나죠. 작은 것들은 존재가 잘 안 드러나요. 마치 우리 사회에서 순광의 무대 위에 힘 있고 돈 있고 명예 있는 사람들만이 빛나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 루저인 듯 보이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역광이 비출 때엔 존재조차 없는 작은 풀꽃들이 눈부신 보석처럼, 지상의 별처럼 빛나거든요. 그 때 정말 저는 감동을 느껴요. 역광에 드러난 풀꽃처럼, 저는 작고 힘없는 토박이 농민들이야말로 일상의 노동 속에서 가장 위대함이 드러나는 존재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계산을 해보니 우리가 마시는 이 물 한잔에 50가지가 넘는 노동이 들어가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우리 사회는 금방 무너지게 돼요. 그 사람들은 이 사회의 피라미드 밑돌 같은 존재인 거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정말 그들이 일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진심으로 경외심이 들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아무래도 역광 사진을 자주 찍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야 그분들 내면의 영혼의 빛이 표현이 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길을 떠나셨다가 고국으로 돌아오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무서운 시차를 느끼죠. 첫째로는 이렇게 깨끗한 나라가 있나 싶어요. 두 번째, 전세계에서 이렇게 여자들이 예쁜 나라가 있나 싶고. (웃음) 그리고 다들 화난 표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국내에 오면 저도 다시 ‘한국 근육’으로 만드느라 아주 힘들거든요. 이렇게 전통이 빨리 무너져버린 나라가 있을까요? 식민지, 전쟁, 가난, 새마을운동, 압축 성장, 민주화, 재개발…. 한마디로 지금의 한국 사회는 ‘터무니’가 없어요. 자기 삶의 터전에 내 삶의 무늬가 새겨져 있지 않다는 말이죠. 어떤 공간에 가면 한 사람 인생의 모든 경험과 기억과 내면적 느낌이 살아나지 않거든요. 그러니 앞만 보고 달릴 수밖에 없죠. 오직 돈밖에 믿을 게 없고. 그런 충격적인 시차를 매번 겪어요. 다시 벙어리가 되어버리죠. 사람도 안 만나고. 너무나 가슴이 아프니까.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고유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인데 ‘나’답게 살아야죠. 외부 경제 흐름에, 타인의 칭찬과 비난에 너무 좌우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 사진을 보시고 한번 생각을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렇게 척박하고 가파른 땅에 살지만 그 사람들이 비참해 보이는지.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잖아요. 각자의 인생에는 진짜로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른 길’에 대한 가능성을 닫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다음 여정은 중국을 염두에 두었다고 들었습니다. =최근의 중국이 경제성장가도를 달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동아시아 문화의 전통이 사라지기 전에 (카메라로) 담아놓으려고 해요. 우리가 비록 전통문화를 파괴한 죄를 지은 세대지만, 이것만큼은 후손에 물려주고 싶다는 기록자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