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린 식구 없고 부모에게 얹혀사는 직장인의 주말은 대체로 한가롭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게으르다. 주말이 좋은 건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일어나는 것도, 밥 먹는 것도, 또 자는 것도 꼭 몇시여야 할 필요가 없다(게다가 씻는 건 생략할 수도 있다). 누군가의 스케줄에 맞추지 않고 내 마음대로 계획 없이 무질서하게 보내는 시간만큼 진정한 휴식의 기회가 또 있을까.
하지만 요즘은 밤 9시55분 전에 모든 일과를 필사적으로 마친다. SBS <세번 결혼하는 여자>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흥행신화를 썼던 김수현 작가의 신작치고는 눈에 띄는 시청률을 기록 중인 건 아니지만 중반을 지나며 점점 더 긴장감을 높여가는 이야기는 8회 연장 소식에 모처럼 환호했을만큼 흥미롭다. 제목이 가장 큰 스포일러인 드라마답게 주인공 은수(이지아)는 벌써 두번 결혼을 했고 이제 남은 것은 두 번째 결혼이 깨진 뒤 세 번째 결혼으로 향하는 이야기인데, 커다란 줄거리를 대략 짐작하고 있음에도 시간 맞춰 정좌하고 본 방송을 보게 되는 건 김수현 작가의 녹슬지 않은 필력에 끌려서다.
사실 부잣집 아들과 결혼했다가 시모의 구박을 못 이겨 이혼하는 여자, 재벌 2세의 구애를 받아 신데렐라가 되는 여자는 <사랑과 전쟁>부터 각종 미니시리즈까지 드라마 속에 수도 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를 한 사람의 삶에 합쳐놓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게다가 태원(송창의)과 이혼하며 데리고 나온 딸 슬기(김지영)를 친정에 남겨두고 떠날 만큼 준구(하석진)와의 재혼을 원했던 은수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 저택에서 항상 우아한 차림새로 사용인들을 부리고 사는 상류층의 생활에서 은수가 마주하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불행이다. 시부모에 시이모까지 층층시하의 재벌가 며느리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낮잠 한숨 편히 못 자고 자잘한 시중을 드느라 “웃다 보면 입이 아파”지는 나날을 보내며 친정 한번 다녀오려 해도 윤허를 받아야 하는 자리다. 하지만 어떻게든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어 분가해 딸과 함께 살려던 계획을 가볍게 무시당한 은수 앞에 닥친 것은 준구가 결혼 전부터 만나온 다른 여자의 존재다. 백마 탄 왕자님이 바람을 피운 것이다.
그러나 <세번 결혼하는 여자>는 시모에게 학대당하고 아이를 빼앗기고 남편에게 배신당한 은수를 그저 불행한 운명에 휘말린 비련의 여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은수의 불행은 자신의 욕망에 따른 선택에서 출발하거나 싹틔워졌다는 점을 집요할 만큼 파고든다. 부유한 대신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남편들은 은수의 결혼이 매번 실패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결혼 당시 무의식적으로 혹은 알면서도 불안요소들에 대해 눈감았던 은수는 뒤늦게야 자신이 ‘있는 집 자식’을 고른 게 아니라 남자들이 먼저 다가온 것뿐이라고 항변하지만 언니 현수(엄지원)는 “넌 그중에서 꼭 부자들만 집어든다”라며 날카롭게 지적한다. 또한 준구의 프러포즈를 받은 뒤 “다시는 그런 자리 내 차례까지 안 올 거”라며 아이 대신 재혼을 택했던 은수는 절대적 모성이라는 신화보다도 개인의 행복을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아이를 사랑하고 미안해하는 동시에 자신에 대한 아이의 신뢰가 깨진 것을 서운해하고 아이에게 상처주기도 하는 은수는 분명 사랑스럽고 호감가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미성숙하고 모순투성이인 한 인간으로 주목하게 되는 주인공이다. 이렇게 빤히 읽히지 않는 인물을 드라마에서 아직 볼 수 있다는 건, 어떤 면에선 참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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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작가에게 남자란?
남자 혹은 ‘남편’이라는 존재의 이기적이고 찌질한 면을 묘사하는 데 있어 김수현 작가의 표현력은 징글징글할 만큼 디테일하다. “감자 좀 쪄줄래?”라는 명대사를 남긴 <내 남자의 여자> 홍준표(김상중)를 뛰어넘는 차세대 주자로 떠오른 김준구가 저지른 가장 심각한 폭력은 부부 강간이지만, 외도 사실이 밝혀진 뒤 이혼을 결심했던 은수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칭얼대고 짜증내고 “유세떨지 말라”고 화내는 그를 보면 하루빨리 은수의 두 번째 이혼을 추진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