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보면 남편의 외도상대를 지칭하는 ‘상간녀’와 마주앉아 기싸움을 하는 여자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남자를 포함한 삼자대면에선 처신이 어눌한 남자의 지리멸렬한 변명을 구경할 수 있지만, 사실 나는 여자끼리 만나는 쪽에 더 흥미가… 당긴다. 각자 그 자리에 없는 이와의 관계를 배후에 두고,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장소에서 향후 관계를 가늠하는 예민한 긴장을 극을 통해 엿보는 재미랄까. 이런 만남에는 상대방에게 물을 끼얹거나 머리채를 잡는 식의 TV드라마 클리셰는 물론이고 그것을 우회해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관계를 해석하려는 의지도 포함된다.
기혼남녀의 외도 이후, 각자의 배우자와 가족들이 겪는 감정의 파고를 끈질기게 좇는 SBS 드라마<따뜻한 말 한마디>에도 상간녀와 만나는 모습이 자주 비친다. 5년 전, 남편 김성수(이상우)의 외도로 크게 마음고생을 했던 나은진(한혜진)은 처지가 뒤바뀐 채로 카페에서 유재학(지진희)의 부인 송미경(김지수)을 기다리며 과거를 회상한다. 남편의 여자를 만나 턱을 치켜들고 반말로 제압하려던 은진은 ‘사랑했지만 그런 시시한 남자 내가 버린다’는 당당한 태도 앞에서 할 말을 잃었었다. 잠시 뒤, 카페에 도착한 미경은 자리에 앉자마자 다리를 꼬고, 은진은 테이블 아래 무릎과 손을 모은 자세로 “서로 사랑한 적 없다”라고 말한다. 평범한 장면인데, 앞서 회상으로 인해 남편의 외도를 먼저 겪었던 은진이 미경의 심리를 헤아리는 이심전심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양이 쥐 생각’의 반대. 쥐가 고양이 생각하는 풍경이다.
수습하려 했던 불륜 상대의 부인이 자신을 관찰하는 줄도 모르고 언니라고 따랐던 은진은 수치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몸살을 앓다 혼절할 정도로 자아가 강한 타입이다. 5년 전 노천카페에서 상간녀의 머리채를 잡았던 그녀는 미경과 성수 앞에선 알아서 죄를 고해바치는 윤리적인 죄인의 태도를 취하며 몸을 낮추지만, 알다시피 질투와 모멸감으로 바닥을 뒹구는 사람이 보기엔 이건 또 이거대로 부아가 치민다. 미경의 입장에서 보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남편은 비싼 장신구 선물 등으로 헛발질을 하는 한편, 은진은 너무 잘 알고 처신해서 도리어 얄미울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드라마 속에서 불륜을 담판 짓는 만남은 왜 하필 양쪽 다 망신살을 피할 수 없는 카페일까? (문득 ‘뷔페’가 떠올라 혼자 웃었다.) 장소섭외가 필요치 않은 한강 둔치나 한적한 공원을 두고 굳이 카페를 찾는 이유는 도덕적 우위를 확신하는 쪽에서 그들을 엿보는 타인을 심리적 아군으로 삼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상간녀의 홈그라운드에서 이루어진 만남도 있다.
SBS 드라마 <세번 결혼하는 여자>에서 재벌가 2세 김준구(하석진)과 재혼한 오은수(이지아)는 남편과 스캔들이 있는 배우 이다미(장희진)의 집으로 찾아간다. 침대에서 은수가 찾아온다는 전화를 받은 다미는 거울을 보고 립스틱을 바른 뒤, 잠옷에 나이트 가운 하나만 덧입은 차림으로 은수를 맞는다. 뻔히 보이는 응접실 테이블을 두고, 주방의 아일랜드 식탁에서 커피를 따른 다미는 “어디 앉을래요? 난 여기가 편한데”라고 말을 건넨다. 불편한 만남을 자기 페이스로 끌어오려는 기싸움. 우아함과 품위로 갑옷을 두른 은수가 둘의 관계를 묻자, 다미는 “준구 오빠는 뭐래요?”라고 되받아치며 은수의 남편을 방패로 삼는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관계의 인정과 동의를 구할 수 없는 공간인 내연녀의 홈그라운드가 주는 위력. 아! 그래서 이 공간에 발을 들일 땐 엄마나 언니, 가까운 친구 등을 대동하고 나타나 세간을 박살내는구나. 실없는 깨달음에 또 혼자 웃었다.
+ α
뭘 입어야 좋을까?
<세번 결혼하는 여자>에서 두 여자의 옷차림이 주는 대비를 구경하다, 역시 김수현 작가의 2006년 리메이크작 <사랑과 야망>이 떠올랐다. 태수(이훈)가 정자(추상미)와 이혼한 뒤, 그와 결혼한 은환(이민영)은 정자의 두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키우지만, 자꾸 엇나가는 딸아이를 가끔 만나달라며 정자를 찾아온다. 흐트러진 머리와 초라한 옷, 고무슬리퍼를 신고 은환을 마주한 정자는 은환이 검은색의 우아한 원피스를 차려입고 나타나 돈을 건네자 “좋은 옷 입고 거들먹거리며 나타나 나 상대로 쇼”하느냐고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