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시인은 <각설하고,>의 ‘작가의 말’ 마지막을 이런 문장으로 끝맺는다. “그래 맞다. 사람들 때문에, 가 아니라 사람들 덕분에, 나는 여기 있는 것이다.”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해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두권의 시집을 내놓은 김민정 시인은 지난해 12월 자신의 첫 산문집 <각설하고,>를 펴냈다. <각설하고,>는 시와 사람에 대한 사랑을 일상 언어로 리드미컬하게 풀어놓은 산문집이다. 그녀는 출판사 난다와 문학동네에서 편집자로도 일하고 있는데, 그런 그녀를 두고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라 칭했다. 한편 의사는 제 몸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미친년처럼” 일해온 시인에게 “3개월은 일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고 명했다. 그러면 뭐하랴. 회사 대신 집에서 일 붙들고 있는 걸. 선후배 문인들이 밤낮 상관없이 술값 없다, 쌀 떨어졌다 전화하는 걸. 각설하고, 그걸 다 받아주는, 사람 좋아하는 “팔자”를 김민정 시인이 타고났는 걸.
-첫 산문집이 나왔다. 두권의 시집이 세상에 나올 때랑 비교해 기분이 어떤가. =산문은 생각도 안했었다. 일단 한국에 제대로 된 에세이가 없다고 생각했고, 새로운 장르의 에세이책을 만드는 게 꿈이었다. 대중에게 읽힐 수 있는 고급 에세이책을 만들어보자 해서 나온 결과물이 황현산 선생님(<밤이 선생이다>)이나 이병률 선배의 책(<끌림>)이었다. 그런데 내 글은 똥글이다. 한겨레출판사 식구들이 무척 힘들었을 거다. 원고 다 태워버리겠다고 난리쳤다니까.
-<각설하고,>는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2부 ‘용건만 간단히’는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은 건데, 그 원고들을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작성했다고. =남의 원고 교정하느라 내 글 쓸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점심시간 30분을 할애해 휴대폰으로 원고 써서 보냈다. 그렇게 1년을 연재했다.
-3부 ‘시다, 수다’에는 나름의 시론을 정리한 글들이 실렸다. =내가 시하고 책밖에 없는 사람이더라. ‘나한테 시란 무엇인가’가 내 첫 산문집에 정리가 안 돼 있으면 다 헛소리가 될 것 같았다.
-작가의 말에서 신형철 평론가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신형철 평론가는 <각설하고,>의 추천의말을 썼다. 두분의 깊은 우정은 언제부터 시작된 건가. =1999년에 시인으로 데뷔하고 <문예중앙>에서 편집장으로 일할 때 형철이 막 문학평론가로 데뷔(2005년)했다. 둘이 동갑내기인 데다 원고를 청탁하고 주고받으면서 ‘친구야’ 하게 됐다. 문학동네에서 형철의 책 <느낌의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10개월 동안 그 과정을 함께하면서 더 돈독해졌다. 그리고 형철이 <느낌의 공동체> 서문에 “삶의 어느 법정에서든 김민정 시인을 위해 증언할 것이다”라는 미친 글을 썼다. 그것 때문에 형철의 팬들한테 질투 심하게 받았다. (웃음) 나도 뭔가 답가를 해야 될 것 같아서 <각설하고,>에 마음을 전했다.
-자기 시를 써내려가는 속도보다 더 빨리 다른 사람의 시집을 펴내고 있다. 열정적인 편집자가 된계기가 궁금하다. =책을 워낙 좋아했는데, 사실 내용보다 껍데기에 관심이 많았다. 패션지 에디터로 일한 적이 있어선지 디자인에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책들이 너무 촌스러운거다. 책은 읽지도 않고 제목만으로 표지 디자인을 하는 그런 책은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또한 황병승, 김경주 시인의 시를 처음 받아 읽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 생생하다. 그런데 편집자가 어떻게 책을 만드느냐에 따라 그 책에 대한 반응도 달라질 것 같았다. 황병승의 첫 시집 제목도 그렇게 해서 <검은 바지의 밤>에서 <여장남자 시코쿠>로 바꾸었다. 내가 만약 시인이 아니었다면 황병승 작가가 내 말을 안들었겠지. 나를 신뢰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밤새워서 그 원고들을 들여다보고 시집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2009년에 두 번째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를 내고 아직 내 시를 못 쓰고 있다.
-편집자로서의 삶이 시인의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친 건 아닌가보다. =주제파악하게 만들어줬다. 남의 시집 안 만들었으면 건방 떨고 살았을 거다. 내 시가 최고다, 하면서.
-<각설하고,>에는 밥 먹고 술 마시는 얘기가 자주 나온다. 수많은 선후배 문인들과 가까워진 비결은 결국 술인가. =주모같다. 배고프다고 오면 국밥 말아주고 재워주는 주모. 그리고 걱정된다. 예를 들면 송찬호 시인이 보은에서 서울왔는데 술 마시고 밤에 집에 갈 길이 만무하잖나. 그런데 이 노인네 객기 부리면서 30만원 부르고 택시 타고 집에 가려 한단 말이지. 그러면 사람들이 나보고 전화하라 한다. 전화해서 “선생님~ 새벽까지 술 받아줄 테니까 차 돌려” 그럴 수밖에.
-여러 군데 잡지사에서 에디터로 일했다. =첫 직장은 <월간 베스트>라는 잡지사였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문학과 문화를 아울러 패션지처럼 만든 센세이셔널한 잡지였다. 편집장이 소설 쓰는 박민규였다. 둘이서 일했는데 곧 폐간됐다. 그리고 <베스트 레스토랑>이라는 와인 잡지가 런칭돼서 면접을 봤다. 편집장이 박찬일 셰프였고, 기자가 김중혁 선배였다. 박찬일 셰프가 “시인과 소설가 데리고 일하게 생겼네”라고 했는데, 그것도 금방 망했다.
-‘시인’ 김민정의 세 번째 시집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일단 따뜻해질 것 같다, 시가. 그리고 원고지에 시를 쓰고 있다. 원고지에 시 쓰게 된 계기가 있다. 이성복 선생님이 어느 날 대구로 부르셨다. 방에서 뭘 꺼내서 보여주는데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의 원고였다. 1980년 9월 28일에 초교 본 원고. 하도 많이 글을 수정해서 원고지가 이만큼 두꺼워져 있었다. 그걸 보니 부끄러웠다. 어른들한테 진짜 많이 배운다.
-그렇게 해서 원고지에 쓴 시는 몇편이나 모였나. =두편 썼다. 4년 반 만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써놓은 시의 제목은 이렇다. ‘여성지의 권두 에세이에나 나올 법한’. 그 정도로 스스로 후지다고 얘기하는 거지. 솔직해야 남들이 덜 깔까봐.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