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가 낭만을 앞세운 첩보물이라면, 잭 라이언 시리즈는 두뇌와 이성을 앞세운 첩보물이다. <붉은 10월> <패트리어트 게임> <긴급명령> <썸 오브 올 피어스>를 잇는 다섯 번째 잭 라이언 시리즈인 <잭 라이언: 코드네임 쉐도우>가 1월16일 한국 개봉을 앞두고 LA에서 기자회견과 인터뷰를 가졌다. 베벌리힐스에서 열린 이 행사에는 잭 라이언 역의 크리스 파인, 윌리엄 하퍼 역의 케빈 코스트너, 영화의 감독이자 악역인 빅터 슈레이븐을 연기한 케네스 브래너 등이 참석했는데, 그중 가장 많은 질문과 관심을 받은 사람은 잭 라이언을 CIA 요원으로 발탁하는 멘토 윌리엄을 연기한 케빈 코스트너였다. 톰 클랜시가 창조한 잭 라이언 캐릭터와 할리우드 첩보물 장르의 진화, 할리우드 스파이 스릴러에 단골 악역으로 등장하는 러시아에 대해 주고받은 인터뷰를 정리했다.

케네스 브래너(오른쪽) 감독은 악역 빅터 슈레이븐을 연기했다.

영화는 순간이다

<잭 라이언: 코드네임 쉐도우> 케네스 브래너 감독

-영화에서 잭 라이언의 적은 러시아다. 러시아 관객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나. =전혀 모르겠다. 나는 영화 속의 러시아를 가능하면 특정하게 묘사하려고, 너무 보편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초점을 맞춘 것은 빅터 슈레이븐이 가진 미국에 대한 불만이었다. 미국의 탐욕,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미국과 체첸에 대한 빅터의 생각, 그의 가족이 겪은 아픔 등을 보여줌으로써 영화 속의 적을 러시아라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아픔을 가진 사람으로 설정하려고 했다. 잭 라이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애국자로만 그린다면 텅 비고 공감할 수 없는 캐릭터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러시아는 이 영화 촬영에 상당히 협조적이었다. 러시아 관객도 이 영화를 좋아하기를 바란다.

-감독으로서 혹은 배우로서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면. =빅터가 저녁식사 테이블에서 캐시(키라 나이틀리)의 호감을 사려고 하는 장면이다. 잭 라이언이 그의 눈을 피해 첩보작전을 벌이는 동안 빅터는 아름다운 여성 앞에서 위대한 러시아 문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옆방에서는 누군가가 죽어가는데, 다른 방에서는 사람들이 모여서 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상당히 러시아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감독하는 영화에서 직접 연기를 할 때, 누군가가 당신을 지켜보도록 한다고 들었다. =이전까지 내가 연출한 영화에 출연할 때 나를 지켜봤던 사람은, 17살 때 오디션에서 나를 심사한 사람이었다. 그는 잔인하리만치 솔직한 사람이었다. “네가 지금 한 말을 못 믿겠다. 다시 해봐라”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배우이면서 오랫동안 나의 연기와 감독 작업을 지켜봐준 친구가 나를 돕고 있다. 이 친구는 잔인하게 솔직하진 않지만 적재적소에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데 능하다.

-촬영 중에 원하는 장면을 얻었는지는 어떻게 판단하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을 때도 있고, 모니터로 확인해야 할 때도 있고, 최고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때도 많다. 영화라는 것은 순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영화 연출은 결코 끝마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떠나야 할 때를 알고 그곳에서 걸어나오는 것이라고도 한다. 나는 생생함을 포착하기 위해서 리허설을 가능하면 많이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침 일찍 촬영하는 것이 다듬어지지 않은 목소리를 얻는 데는 최선이며, 클로즈업부터 먼저 촬영한다.

-저예산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그럴 때면 감독으로서 인맥을 동원해서 아는 배우에게 청탁해야 하지 않나? 이를테면 키라 나이틀리가 이번 영화에서 당신의 부탁을 받고 출연했다고 들었다. =돈과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게 마련이다. 그게 저예산 독립영화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다. 하지만 배우들은 내가 부탁한다고 해서 출연하지는 않는다. 케빈(코스트너)이든 키라(나이틀리)든 그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내가 부탁한다고 해서 연기하게 할 수는 없다.

첩보물은 전쟁을 겪으며 진화했다

윌리엄 하퍼 역의 케빈 코스트너

-<잭 라이언: 코드네임 쉐도우>는 당신이 출연한 첫 프랜차이즈영화다. =나도 그게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내가 속편에 출연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내가 속편들에 만족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내가 만들거나 출연한 영화들에 두 번째 기회가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내게 <노 웨이 아웃>과 가장 유사한 기회였고, 그래서 이 영화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훌륭한 영화가 될 것이며 성공한 블록버스터가 될 거란 확신이 있었다.

-첩보물 장르는 꾸준히 영화로 만들어졌다. 당신이 보기에 이 장르는 어떻게 진화해왔나. =이런 영화들은 전쟁을 겪으며 만들어졌다. 턱시도를 입고 예쁜 여자들과 어울리는 로맨틱한 스파이, 제임스 본드는 그렇게 태어났다. 하지만 첩보물은 점점 진지한 면을 부각하기 시작했고 정보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것이 마땅히 진화해야 하는 방향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 하는 만큼 현실적인 이야기를 강하게 원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전세계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을까? 경제일까? 정보일까? 세상은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바쁘게 돌아가고 있고, 이런 세상에서 만들어지는 첩보물에는 나보다는 젊은 남자가 필요했다. (좌중 웃음)

-‘젊은 남자’라는 말이 나와서인데, 크리스 파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크리스는 상당히 세련된 연기자이며 클래식한 배우다. ‘클래식하다’라는 말은 때로는 지루하다는 표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영화의 주연배우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이 일을 우아하고 즐겁게 해냈다. 그는 내가 젊었을 때보다 훨씬 단련된 배우다. 이 시리즈에 새로운 삶을 불어넣기 위해 심사숙고해서 고른 배우인 만큼 나는 그가 무척 좋다.

-배우 겸 감독으로서 또 다른 배우이자 감독인 케네스 브래너와 함께 일하는 것은 어떤 경험이었나. =당신이 사랑을 나누려고 할 때, 다른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보지 못하면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좌중 폭소) 마찬가지로 나 역시 다른 배우이자 감독이 연출하고 연기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연출하고 연기하는 것을 보는 것은 내겐 큰 즐거움이었다.

케빈 코스트너, 크리스 파인(왼쪽부터).

다양한 캐릭터 사이에서 균형을 찾았다

잭 라이언 역의 크리스 파인

-잭 라이언이 등장하는 앞선 영화들에서 참고한 것이 있다면. =이전에 만들어진 잭 라이언 시리즈는 모두 보았다. 그래서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을 때 기억에서 꺼내서 참고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알렉 볼드윈의 캐릭터는 영리하고 대담하며 자신감에 차 있다. 해리슨 포드의 캐릭터는 자신이 영웅이길 원하지 않는 영웅이다. 가족을 중시하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그려진 캐릭터를 되살리는 작업이니 나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고 했다.

-잭 라이언은 해군인 동시에 금융계에 종사하는 전문가이고 CIA 요원이기도 하다. 이런 세 가지 전문직에 대해 조사를 했는지 궁금하다. =물론이다. 실제로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5개월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우선 대본을 내 것으로 소화하려고 노력했고 해당 직종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에서 가장 도움이 된 것은 재활원에서 생활해야 했던 베테랑들을 만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받은 충격과 상처를 어떻게 이겨냈는지에 대해 들은 것이었다.

-케네스 브래너와 제작자인 로렌조 디 보나벤투라가 당신을 “분석적인 배우”라고 했다. 어떤 장면에 신경을 가장 많이 썼나. =윌리엄이 잭을 CIA 요원으로 고용하는 장면이었다. <잭 라이언: 코드네임 쉐도우>는 이야기의 진행속도가 빠른 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는 이 영화가 개연성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잭이 어째서 CIA 요원이 되기로 하는지가 중요했다. 잭은 육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 역시 “왜?”라는 질문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당신의 팬인가? 영화 속에서 연기하는 자신을 보는 일은 어떤가. =예전보다 점점 나아지고 있다. 대부분 내가 나 자신의 연기를 보는 건 고통스럽지만 일은 일이다. 나와 영화 속의 나 자신을 분리해서 보는 일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