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TView
[유선주의 TVIEW] 추억은 없다

MBC드라마 <미스코리아>가 1997년을 회상하는 방식

<미스코리아>

“자, 출발! 스따뜨!” 궁둥이를 철썩 때리는 퀸 미용실 마 원장(이미숙)의 호령이 떨어지자, 잔뜩 부풀린 헤어스타일에 수영복만 입은 여성이 지하철 승객들의 시선을 받아내며 미스코리아 워킹을 선보인다. 몸에서 가장 살이 많은 부위를 후려치는 차진 소리가 귓가에 꽂히고, 외투를 껴입은 승객들 사이로 새파란 수영복이 눈에 박히는 충격에 잠깐 정신이 얼얼했다. 미스코리아 하면 온 가족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맘에 드는 후보를 점찍고 품평하던 추억이 먼저 떠오르는 한편으론, 대회를 앞두고 수치심을 이겨내는 특훈이 필요할 만큼 남 앞에서 맨살을 드러내 이목을 끄는 일이 지금보다 더 부끄럽고 조심스럽던 것도 같은 시절의 정서였다.

지금은 사라진 직업인 ‘엘리베이터 걸’을 처음 보던 때도 떠오른다. 두꺼운 화장을 한 예쁜 언니가 “올라갑니다”라고 안내하자 흠칫 놀란 기색을 감추고 자연스러운 고객을 연기하려 애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 걸을 그 공간의 일부처럼 무심히 여기게 되었다. 미스코리아를 상징하는 사자머리와 파란 수영복의 이물감을 무대라는 배경과 함께 당연한 규칙같이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리고 그녀들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대형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상승과 하강을 알리는 녹음된 목소리가 아마 그녀들의 흔적이겠지.

1997년 IMF 무렵을 다룬 드라마 MBC <미스코리아>는 파란 수영복과 대비되는 흰 허벅지의 강렬한 이미지에 ‘철썩’ 하는 살 소리를 입혀 그녀가 ‘사람’임을 퍼뜩 깨닫게 했듯, 점심도 굶고 근무를 서는 스물일곱살의 백화점 엘리베이터 걸 오지영(이연희) 역시 고객들 사이에서 ‘꼬르륵’ 소리를 숨기지 못하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없는 틈을 이용해 엘리베이터 모서리에 바짝 붙어 급히 깐 계란을 한입에 우겨넣는 처연한 뒷모습. 구조조정으로 아예 직업군 자체가 사라질 위기 앞에서 지영은 수많은 진을 만들어낸 퀸 미용실의 마애리 원장과 화장품 벤처기업 사장이 된 옛 연인 김형준(이선균)에게 12월로 연기된 미스코리아 대회 출전 제안을 받는다. 자금 압박으로 사채를 쓴 형준의 뒤에는 연말까지 돈 5억원을 받아내야 하는 깡패 정선생(이성민)이 있고, 투자를 미끼로 형준의 회사를 인수해 되팔려는 기업사냥꾼 이윤(이기우)까지 엮여 있는 형편.

<미스코리아>는 위기를 극복하는 인간성이나 도전의식 등이 살아 있던 시절로 과거의 어떤 시점을 포장하는 유의 이야기와 유사해 보이지만, 추억을 파는 퇴행적인 낭만에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열일곱과 열아홉살. 성적인 긴장이 깔린 지영과 형준의 풋사랑은 더없이 싱싱하고 달콤했던 한편, 지영을 ‘발랑 까진 년’, ‘싸고 헤픈 년’, ‘머리에 똥만 든 년’이라고 험담하고 다녔던 형준은 십년 뒤, 한층 더 비겁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고교 동창 이윤에게 투자를 요청하는 자리에서 교복을 연상케 하는 더플코트를 입은 형준은 투자를 거절당하자 화장실에서 뒷돈을 건네려 하고, 지영을 이용해 회사를 살려보려고 접근할 때도 종이비행기와 옛날 안경, 500원짜리 지폐에 메모를 적은 추억 소품을 들이밀었다. 절박해서 추억을 팔고, 거짓말과 허풍을 반복하던 그는 지영이 마 원장을 택한 이후에야 비로소 잘못 끼운 단추를 바로잡기로 결심한다.

IMF로 인해 각자의 연약한 지반이 흔들리고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이 전과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97년의 회고담 <미스코리아>는 신뢰와 유대는 앙금 같은 추억만으론 부족하다고 운을 띄웠다. 불황 극복 판타지를 반복하자고 그 먼 길을 돌아가는 건 아닐 것이다.

고졸입니다!

서숙향 작가의 드라마에는 유독 고졸 출신의 여주인공이 자주 등장한다. 오지영은 상고 졸업도 전에 엘리베이터 걸로 취직했고, <대한민국 변호사>의 고졸 변호사 우이경(이수경)은 변호사 애인이 변심하자 그가 남기고 간 법전으로 공부해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파스타>의 서유경 역시 고졸 출신의 풋내기 요리사였다. <로맨스 타운>의 노순금도 고졸의 가사도우미. 콤플렉스를 감추지 않으면서도 꺾이지 않는 단단한 심지가 이들의 공통점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