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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의 오! 마돈나] 스크린을 찢고 뛰쳐나온 팜므파탈

조앤 베넷 Joan Bennett

만약 필름누아르의 팜므파탈이 스크린 밖으로 나온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육감적인 몸을 감싸는 검정색 드레스를 입고, 긴 담배를 입에 문 관능적인 여성이 당신 곁에 와서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부탁한다면 말이다. 허구에선 그 여성과의 위험한 관계를 상상할지 몰라도, 현실에선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못됐다고 경멸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는 팜므파탈이 스크린이라는 조건 속에서 상상력을 자극할 때 성적 욕망을 느끼지만 그것이 현실의 일이 되면 스캔들로 해석하고 금방 흥미를 잃고 만다. 필름누아르의 퀸 가운데 한명인 조앤 베넷의 삶은 그런 사실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프리츠 랑의 뮤즈

조앤 베넷은 프리츠 랑과 작업하며 누아르의 퀸으로 대접받았다. 출발은 <맨 헌트>(1941)였고, 출세작은 <창가의 여인>(1944)이었다. 당시 다른 배우들과 달리 베넷은 서른이 넘어 제대로 된 캐릭터를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팜므파탈이다. ‘어둡고 위험한 여성’이라는 캐릭터를 위해 베넷은 남들이 부러워하던 금발을 짙은 갈색으로 염색했고, 이 색깔을 평생 유지했다. 이 영화에서 베넷은 검정색 옷에, 담배를 입에 물고, 법학 교수로 나오는 에드워드 G. 로빈슨을 함정에 빠뜨린다.

남자 앞에서 주저하지 않는 성적 자신감, 여유 있는 행동, 상대를 유혹하는 눈웃음, 그리고 지적인 대화술로 그녀는 단번에 노교수(그리고 관객까지)를 자신의 먹이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평생 공부만 하던 순진한 교수는 아내와 아이들이 휴가 간 사이 잠시 일탈의 유혹을 느꼈는데, 그만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희생자 에드워드 G. 로빈슨, 팜므파탈 조앤 베넷, 그리고 비열한 협박자 댄 더리야(당시 비열한 연기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로 이뤄진 이들 삼인조의 범죄물은 같은 해에 발표된 빌리 와일더의 <이중배상>과 경쟁하며 누아르의 걸작이 됐다.

프리츠 랑은 한번 더 이들을 그대로 캐스팅하여 <진홍의 거리>(1945>를 만든다. 여기서 로빈슨은 역시 순진한 회계담당 직원, 조앤 베넷은 팜므파탈, 그리고 더리야는 협박꾼으로 나온다. 스토리는 진부하다. 협박꾼과 팜므파탈이 밤에 길에서 싸우는 척하고, 이를 본 회계직원이 신사도를 발휘하여 여성을 구하는데, 그만 여성의 함정에 빠져 사랑의 노예가 되고 결국 돈을 뜯기며 패가망신하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홍의 거리>는 전작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둔다. 그림자와 빛의 황홀한 화면을 만드는 프리츠 랑의 연출력도 물론 흥행 성공의 이유가 됐지만, 스타덤에 오른 조앤 베넷의 덕도 컸다. 그런데 영화는 성공도 거뒀지만, 혹독한 시련도 겪는다. 이듬해에 <진홍의 거리>는 ‘외설적이고, 천박하고,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이라는 이유로 일부 주에서 상영이 금지된다. 흥미로운 것이, 검열이 내세운 수식어들은 전부 팜므파탈 조앤 베넷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제 베넷의 행보는 거칠 게 없어 보였다. 전후에 또 다른 거장인 장 르누아르를 만나 <해변의 여인>(1947)에서 역시 팜므파탈로 출연한다. 얼마나 기세가 등등한지 누아르의 남성 아이콘이자 야생마 같은 배우인 로버트 라이언을 속된 말로 갖고 논다. 폭력적인 로버트 라이언이 순치된 남자로 나오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조앤 베넷이 죄를 짓고도 당당하게 “그래, 어서 밖에 가서 말해봐. 내가 나쁜 여자라고. 넌 이제야 그걸 알았어”라고 조롱하듯 말하며 라이언을 쏘아볼 때는 ‘거세 위협자’의 공포가 느껴질 정도였다.

스캔들을 넘어선 영화의 역사

그런데 다시 프리츠 랑을 만나 <비밀의 문>(1948)을 발표하며 베넷은 배우로서의 위기에 놓인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레베카>(1940)처럼 ‘출입이 금지된 방’의 모티브를 이용한 이 영화는 흥행에서 참패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베넷이 어울리지 않게 <레베카>의 조앤 폰테인처럼 순진하게 공포를 연기하는 게 어색해 보였다. 베넷은 공포의 주체이지 동정심을 유발하는 연약한 여성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스캔들이 터졌다. 베넷의 남편은 할리우드의 유명 제작자인 월터 왱어다. 그가 염색도 시켰고, 팜므파탈이라는 캐릭터도 만들었고, 프리츠 랑을 섭외하여 베넷의 출세작을 모두 제작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베넷의 세 번째 남편이었는데, 소유욕이 지나쳐서인지 아내가 다른 남자와 가깝다는 정보를 접한 뒤 곧바로 38구경 권총을 들고 가서 그 남자를 쏴버렸다. 흥분했는지 한발은 허공을 갈랐고, 다른 한발은 바닥에 튀어 하필이면 그 남자의 사타구니를 맞혔다. 황색저널이 좋아하는 엽기의 복수 드라마였다. 다행히 남자는 큰 부상을 입지 않았고, 왱어도 총으로 위협만 하려 했는데 사고가 났다는 식으로 정상참작이 되어 4개월형을 선고받았다(형량에서 그의 대단한 권력이 짐작될 것이다). 1951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베넷의 연기경력은 사실상 거기에서 끝났다. 당시의 관객은 욕망의 대상이자 숭배의 대상인 팜므파탈이 스크린이 아니라 ‘현실’에서 누아르와 같은 막장 드라마를 만들어내자 곧바로 혐오감을 드러냈다. 팜므파탈의 윤리적 위반이 허구 속에 있을 때, 곧 브레히트의 ‘제4의 벽’을 넘지 않을 때, 우리는 책임감에서 해방된 채 쾌락(guilty pleasure)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게 현실로 넘어오면 문제가 달라진다. 말하자면 제4의 벽은 사랑에 필요한 인습적 장벽의 미학적 장치인 셈인데, 그 벽을 넘은 팜므파탈에겐 리비도가 발동되지 않는 것이다. 역시 프로이트의 말대로, 사랑은 장애가 있을 때 더 매력적이다. 스크린의 내부가 아닌 현실의 스캔들은 사람들의 죄의식까지 자극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신경질적으로 혐오하고, 있지도 않은 순결을 천명하는 위선자가 된다. 이것은 허구에서 반드시 뒤따르는 팜므파탈에 대한 처벌을 현실에서 수행하는 것과 같다.

베넷은 스캔들로 처벌받았다. 영화배우로서는 더이상 관객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훗날 TV에서 약간 활동했고, 스크린에선 거의 잊혀졌다. 굳이 예외를 꼽자면 이탈리아의 호러 감독인 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1977)에서 기숙학교 교장으로 나온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사는 프리츠 랑, 장 르누아르와 함께 만든 필름누아르를 여전히 그녀의 영광으로 기록하고 있다. 영화의 역사는 스캔들을 넘어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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