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 눈이 탈모를 유발한다는 뉴스 이후론 우산 없이 눈을 맞을 때마다 어쩐지 미래의 머리숱을 담보로 한 일탈을 벌이는 기분이 든다. 중국발 초미세먼지 경보에 눈 맞기는 더 께름칙해졌다. 그래도 눈은 여전히 희고 고요하게 풍경을 바꿔놓는다. 아마 김병욱 감독의 시트콤을 사랑하는 이라면 ‘첫눈을 받아먹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도 기억할 것이다. MBC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중 토끼인형을 차로 친 박하선은 그게 인형이었단 걸 알고 나서도 통곡을 멈추지 못하다 첫눈이 내리자 이내 진정되어 아이처럼 입을 벌리고 눈을 받아먹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을 접었던 서지석도 그 눈에 다시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지구에 접근한 행성으로 인해 한바탕 종말 소동을 겪었던 tvN <감자별 2013QR3>의 세계에도 첫눈이 내렸다. 완구회사의 고문 노수동(노주현)의 집 차고에서 겨울을 나는 인턴 나진아(하연수)와 그 집 가짜아들로 잠입한 진짜아들 홍혜성(여진구)도 거리에서 첫눈을 맞았다. 행복한 표정으로 눈을 반기는 사람들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두 사람 역시 눈을 받아먹으며 되는대로 소원을 말한다. “10억 갖게 해주세요!” “100살까지 살게 해주세요!”
드라마 속 인물들은 참 자주 소원을 빈다. SBS <상속자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의 제국그룹 김원(최진혁) 사장은 청혼할 수 없는 가난한 연인에게 ‘위시본’(가금류의 목과 가슴 사이에 붙어 있는 V자 형태의 뼈)과 그 형태를 본떠 만든 목걸이를 선물한다. “미국 애들이 좋아하는 건데 두 사람이 한쪽씩 잡고 당겨서 더 길게 부러지는 쪽을 잡고 있는 사람 소원이 이루어진대.” 뒤에 그의 연인은 위시본을 제 손으로 부러뜨리며 ‘그만 헤어지자’는 소원을 말한다. 이외에도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에는 소원을 비는 이국적인 장소 활용이 빈번하다. <파리의 연인>에선 분수에 동전을 던졌고, <프라하의 연인>에선 소원의 벽에 메모를 써붙였다. 비는 소원이 워낙 많다보니 소원 성취에도 규칙을 읽을 수 있다. 남이 빌어준 소원은 성취 확률이 높고, 먼저 빈 소원에 반하는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더라.
로맨틱한 소원 빌기를 뒤집은 경우도 있다. <주군의 태양>의 킹덤백화점 사장 주중원(소지섭)은 귀신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분수 앞을 서성이는 아이에게 동전을 내밀었다. “꼬마야 너도 소원 빌고 싶니? 이거 줄 테니까 엄마 앞에서 네 소원을 큰 소리로 말하고 던져라. 네 소원은 저기 2층 키즈몰에 가면 이루어질 거야.” 그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의 소원은 소비를 동반’한단다. 알다시피 드라마 속 소원이라고 다 이루어지진 않으며, 모두 달콤한 것만은 아니다. 타인의 소원에 매출을 연결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무시무시한 집착을 영원을 상징하는 보석에 담아 소원 아이템을 자체 제작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소원을 빌 땐 대개 의미가 담기기 마련.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이전의 의미를 덜어내는 소원 빌기가 있었다. 나진아와 홍혜성이 첫눈을 받아먹으며 소원을 말하던 그때다.
길이 막히고 불편해서 눈이 싫다고 말한 진아와 그냥 싫다던 혜성은 눈을 받아먹으며 아무 소원이나 내뱉고 깔깔거리며, 눈이 쌓인 자동차에 글씨를 쓰는 장난을 친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는 버스에 앉아 별말 없이 각자의 기억 속에 잠긴다. 어린 시절 진아는 첫눈 오는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혜성은 고아원에 맡겨진 기억이 있다. 첫눈에 얽힌 사적인 의미를 굳이 말하지 않는 두 사람은 남들처럼 쾌활하게 소원을 빌었고, 남들처럼 장난치고 사진도 찍었다. 사랑의 향방을 가늠할 어떤 복선도 의미도 없는 평범한 첫눈. 그런데도 어쩐지 아릿해서 오래 기억날 것 같다. 매해 첫눈이 올 때마다.
+α
63빌딩 엘리베이터에서 숨참기?
급조된 거짓말이 소원 빌기의 명소를 만든 경우도 있다. SBS <마이걸>의 생계형 뻥쟁이 주유린(이다해)은 설공찬(이동욱)을 놀리기 위해 “63빌딩 꼭대기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1분40초 동안 숨을 참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뻥을 늘어놓는다. 좋아하는 사람의 말은 어쩐지 신경 쓰이고 따라하게 되는 심리 때문에 설공찬은 엘리베이터에서 숨을 참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