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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x cross] 태초에 입술이 있었다
이후경(영화평론가) 사진 최성열 2013-12-23

<꼬리 치는 당신><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펴낸 시인 권혁웅

<꼬리 치는 당신>은 희한한 책이다. 흑백 동물도감 같기도 하고, 동물에 관한 시집이나 에세이집 같기도 하며, 내 멋대로 동물사전 같기도 하다. 심지어는 때때로 자못 의미심장하게 인간 세상을 기록한 도록으로 분신술을 부리기도 한다. 그런 책이 참을 수 없이 신박하여 책을 쓴 권혁웅 시인을 만나보기로 했다. 그는 얼마 전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는 시집도 낸 참이다. 순댓국집과 부대찌개집과 감자탕집과 김밥천국집을 어슬렁거리며 시 한 사발에 웃음과 눈물을 같이 말아내는 그의 솜씨는 또 얼마나 정겨운지. “첫 시집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쓴 서정시들로 채우고 나니 뭔 시가 다 울기만 하나, 웃는 시도 있어야지, 하는 깨달음이 오더라”고 말하는 그는 그렇게 동물과 인간 세계를 모두 한 풍경으로 끌어안는다. 그와 함께 두 세계 사이에 놓인 돌다리를 두들겨보았다.

-책이 참 예쁩니다. 동물 책에 애착을 갖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원래 교회돌이 캐릭터였어요.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창조론자로서 진화론의 논리적 맹점을 깨보고 싶어졌죠. 근데 진화론이 맞는 거예요. 생물체의 몸은 환경의 지배를 받잖아요. 인간이 혼자 좋거나 슬퍼하는 게 아니라 누굴 만나서 좋고 누구랑 헤어져서 슬픈 것처럼, 동물도 그렇다는 걸 알게 되면서 동물 책 찾아 읽는 게 재밌어졌어요.

-동물에 대한 관심이 시나 평론을 통해 보여준 인간 세속에 대한 관심과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초월적인 세계를 노래하는 시인들도 있는데, 저는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이 지지고 볶고 먹고 울고 응아 보는 세계에 가장 관심이 있어요. 그 너머의 것들은 오히려 그런 것들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동물에게도 영혼이 없는 게 아니라 먹고 싸고 교미하는 게 영혼이라고 믿어요. 그런 걸 언어로 잡아내고 싶습니다.

-동물애호가 중에는 자연 세계의 질서를 이상화하는 부류도 있고 그 세계에 있는 혼돈을 직시하며 인간 세계와의 상동성을 강조하는 부류도 있는데, 후자이신 듯합니다. =동물 세계가 이상적이라곤 전혀 생각지 않아요. 동물 사회에도 극단적인 고통이나 슬픔이 있어요. 어느 생물학자가 말했듯 사자에게 쫓기는 얼룩말이나 사슴의 공포와 고통은 화면으로도 충분히 느껴지거든요. 근데 극단적이어서 오히려 인간이 경험하는 감정을 훨씬 순수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가장 친애하는 동물은 역시 땅돼지인가요. =착하고 섹시한 동물이에요. (미소) 다이어트한 돼지처럼 생겼고요. 겁이 많아서 굴을 파고 들어가 사는데 다른 동물이 와서 뺏어가면 다 뺏기고 다른 데 가서 또 굴 파고 살아요. 저희 집도 어렸을 때 1년에 한번씩 산동네로 이사를 다녔거든요. 그 느낌이 땅돼지를 보면서 들더라고요.

-동물 보호론자까지는 못 돼도 인간제일주의자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되셨다고요. =성경에 보면 아담이 부른 것이 곧 동물의 이름이 됐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인간만이 다른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줄 수 있고, 그래서 지배할 지위와 권한도 있다는 뜻인데요.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나무 위에서 내려온 원숭이고 특별히 잘난 구석이 없어요. 오히려 가진 지능만 믿고 우세종으로 군림하며 많은 동물들을 멸종시킨 책임이 있죠. 인간은 자기가 못난 동물인 걸 잘 모르는 동물 정도가 아닌가 생각해요.

-명명법과 관련해 동물의 이름을 언어유희적으로 끌어다 쓴 글도 많습니다. =명명법의 언어 규칙이란 게 다 인간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반영한 거니까요. 다만 인간의 이름에는 부모나 가문의 욕망이 담겨 있는데, 동물은 이름에서 빠져나와 있으니까 오히려 각자의 고유한 삶을 사는 것 같아요.

-갑자기 선생님의 이름에 담긴 뜻이 궁금해집니다. =권세 권, 빛날 혁, 영웅 웅자예요. 영어로 하면 파워풀 브릴리언트 히어로니까 이건 사람 이름이 아니라 무슨…. (웃음) 보시다시피 저는 그런 사람은 못 됐죠.

-어느 장르도 아닌 이 책의 형식도 특별합니다. 이전에 내신 책을 봐도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운 글쓰기를 늘 고민하시는 듯해요. =저는 시인인데, 지금은 소설의 시대잖아요. 시집을 아무리 내봐야 지인한테 돌리고 나면 적자…. (웃음) 농담이고요. 장르에 갇혀 있는 걸 안 좋아해서 장르를 자유롭게 교통하는 글쓰기를 많이 해보고 싶었어요. 그러다 일기, 메모, 독서 노트 등에서 한두 구절을 뽑아내서 쓴 몸에 관한 산문시집 <두근두근>을 냈고, 그게 원형이 됐습니다. 동물사전을 쓸 때 드디어 트위터에 맛을 들였는데, 140자 안에 핵심만 쓰는 훈련이 되더라고요.

-SNS를 통한 소통의 경험이 이번 시집의 정조에 미친 영향도 있을까요. =요즘 제가 밴드도 하는데요. 아, 그 밴드 말고, 네이버 밴드요. 초등학교 동창들이랑 얘기하다 보면 정말 재밌어요. 맞춤법이 하나도 안 맞아서 얘가 무슨 말을 쓰려고 했을까 짐작이 안 가는 글도 있는데, 같이 노는 재미에 저도 30분씩 답글 달고 앉았어요. 살아온 길은 천차만별이라도 이렇게 같이 늙어왔구나 싶어요.

-<마징가 계보학>에 이어 이번 시집에서도 이념, 역사 같은 큰 개념보다 생활의 접촉면을 모아 만든 듯한 선생님만의 시 세계가 엿보입니다. 그 뿌리는 선생님의 어린 시절에 있을까요. =당연할 겁니다. 저한테는 대문자 역사, 대문자 인간보다 옆집 아줌마 바람난 이야기, 아무도 없이 죽어간 누구, 어느 집의 가출한 아들이 더 중요해요. 그런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잘 포착해서 글로 모으면 그게 민중사이고 보편사가 될 거라 생각하고요. 언젠가 한 네티즌이 제 시에 대해 <개그콘서트> ‘생활의 발견’의 시 버전 아니냐고 한 걸 봤는데요. 답글은 못 달았지만(네티즌 댓글에 답글 달면 끝이죠) 시가 그러지 말란 법은 없죠.

-시집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를 보면 대문 시가 <호구>(糊口)이고 이어 표제시를 비롯해 먹는 것에 관한 시가 많이 나옵니다. 음식감성사전이란 부제도 어울릴 것 같아요. =먹는 게 우리 본성을 잘 드러내는 것 같아요. 맛은 언어가 아니지만 해장국이나 부대찌개 하면 그 맛을 통해 환기되는 추억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잖아요. 그게 언어화될 수 있죠. 이번 시집에 김치찌개는 넣고 된장찌개는 못 넣었는데, 먹는 걸로 시집 한권 더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오장육부의 감각은 인간의 둔한 감각 중 하나인데, 선생님의 시에서는 가장 명징한 이미지로 태어났습니다. =그게 시적 언어의 힘인 것 같아요. 일상어가 가 닿지 못하는 영역들을 설명할 때 다른 일상의 영역을 가져와 빗대어 설명할 수가 있죠. 특히 비유는 그걸 가능케 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고요.

-평론집 제목을 <입술에 묻은 이름>이라고 붙인 적도 있으신데, 입술을 통해 세상과 시가 매개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갑자기 야한 시인으로 변하고 있는데…. (웃음) 입술은 사랑의 도구이자 말하는 도구이자 먹는 도구잖아요. 말한다는 건 내 안의 것을 입 밖으로 꺼내 귀로 다시 듣는 것이라, 내 영혼을 내 앞에 세워놓는 행위죠. 또 먹는다는 건 유기체를 유지시키는 행위로서 모든 생물들 사이에서 나라는 생물을 구별해주는 행동이고요. 그러니 입은 언어, 생명, 영혼, 자의식, 사랑 전부를 모두 포괄하는 도구예요. 그래서 자꾸 입으로 돌아가게 되네요.

-손이나 눈보다 입술의 감각을 믿으시나요. =손은 만지는 도구로서 지배력이나 능동성에 훨씬 가까운 도구 같아요. 우리가 사람을 만나면 맨 처음엔 손잡았다가 뽀뽀했다가 온몸을 만지잖아요. 손은 더 지배하려고 드는 거죠. 하지만 입술은 더 갈 데가 없고 그냥 받아들이는 거니까요.

-그렇다고 몸의 감각을 물신화하거나 환상시하진 않으시는데, 나이 먹음과 관계가 있을까요. =옛날에는 삼일 밤낮을 술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삼일씩 누워 있어야 해요. 근데 몸이 변한다는 건 세상이 나한테 이야기해준 것들이 나한테 다 기록되고 있는 거기도 하죠. 입술이 말하는 것이 다시 몸에 기록되는 것 같이요. 몸이 하나의 커다란 입술이라고 하면 될까요?

-시집에도 술기운이 많이 묻어 있습니다. =등장 음식도 주로 소주와 어울리는 음식이죠. 제가 소주 예찬론자라…. (웃음) 술이 좋아 술집 순례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술집의 표정들에 익숙해진 것 같아요. 근데 제가 언젠가부터 환한 형광등 빛 아래서 술을 먹더라고요. 왜 이렇게 됐나 생각해보니 저한테 데이트의 가능성이 없어진 뒤부터였어요. 어두컴컴한 데 가봐야 할 것도 없고. 이 시집이 중년 냄새가 좀 나잖아요. 나도 연애시 참 잘 썼는데 어느 순간 보니 아저씨 시만 남아 있고. 허허.

-그래도 연애의 감각은 이 시집의 중요한 축으로 보입니다만. =그게 아니면 살 가치가 없죠.

-그럼 공식적으로만 연애를 끊으신 걸로…. =아내랑 해야죠.

-선생님께 연애란 무엇인가요.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체험이죠. 한 생명과 다른 생명이 만나서 한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흘러가보는 일. 그게 없으면 너무 쓸쓸하잖아요. 아, 아침에 아내가 ‘시를 쓰게 해주는 가장 큰 힘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답 알지?’라고 했는데, 그 질문으로 답을 대신하겠습니다.

-(웃음) 혹시 계획 중이신 다른 사전은 없으세요. =떠도는 얘기들 중에 웃기고도 쓸쓸한 얘기들을 채집하고 있어요. 올겨울에 <삼팔선에 관하여2>를 썼거든요. 책상 위의 38선에 이어 침대 위의 38선입니다. 다 아시는 얘기예요. 오빠 믿지? 손만 잡고 잘게. 그거 너무 잘 지키면 한참 뒤에 그녀가 묻죠. 오빠,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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