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설가를 인터뷰할 때, 요즘 젊은 작가 중 누구를 좋아하시나요 물으면 가장 자주 나오는 이름이 있다. 바로 황정은이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말과 글의 맛이 고루 살아 있는 문장과 환상성, 숨어 있는 유머감각은 빠지지 않는다. 경장편 <百의 그림자>로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고, 단편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을 쓴 그녀의 신작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도 어머니의 폭력에 노출된 여린 형제의 아픈 현실과 솜털처럼 간질거리는 유머가 기묘하게 손가락을 얽은 그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사실적인 상황 전개마저 환상적으로, 비현실적으로 느끼게 하는 소설을 잘 쓴다. 소설을 쓸 때 분위기와 내용, 어떤 걸 먼저 생각해내나. =소설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장소나 장면을 떠올릴 때가 있다. ‘그 장면을 소설로 이야기하고 싶다’에서 시작한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세상이 곧 망할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빨리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세상의 끝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와 있는 게 아니라 매일 조금씩 다가오는 것 아닐까.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그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떤 것일까. 그와 관련된 세 가지 이야기였다.
-세 이야기가 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에 들어 있나. =아니다. 처음의 구상은 마지막 문장이 똑같은 세편의 소설이었다. 마지막 문장에 이르기까지가 완전히 다르고 맺음은 같은 문장이지만 그 문장의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지는 세개의 이야기. 그중 첫 번째 작품이다. 두 번째까지는 써놨다. 그런데 완전히 똑같은 문장으로 끝맺지는 못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 아이들을 중심에 놓은 이유는. =어느 날 세상에 던져진 아이들이 주어진 상황대로 견뎌내는 모습은 어른의 경우라고 다를 것 없다. 하지만 그런 삶을 가장 작은 덩어리로, 약한 덩어리로 보여줄 수 있는 게 바로 아이들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해놓고 일본에 갔는데, 오사카 한신백화점 사거리, 그 사람 많은 곳에서 여장을 한 노숙자가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평지인데, 비탈길을 오르는 듯 앞으로 몸을 숙이고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지금 구상하는 이야기의 페르소나가 되겠구나, 화자가 되겠구나 싶었다.
-재개발에 관심이 많은 건가. <百의 그림자>는 재개발 논의가 벌어지는 세운상가가 무대고, 이번 이야기도 재개발 직전의 동네에서 벌어진다. =특별히 관심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재개발은, 인간의 욕망이 리얼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자기에게 그런 욕망이 있는지도 모르던 사람들조차 자기가 사는 동네가 재개발된다는 말을 들으면 확 바뀐다. 나는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무대인 고모리와 유사한 동네에서, 5년 전에 재개발 직전까지 살고 나온 적이 있다. 논이 있고… 서울의 마지막 개발지…. 사람이 정말 없었다. 빈집도 많고. 그런데 어느 날 차들이 오가더니 갑자기 생긴 컨테이너에 16가구가 살고 하는 일이 벌어지더라…. 제일 약하고 조그만 덩어리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못 보게 만드는 게 어른들의 욕망이 극대화되는 상황이다. 그게 재개발에 선정되고 진행되는 그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TV를 보는 장면이 인상적인데, “웃음이 많거나 누군가 즐거워 보이는 프로그램은 선택하지 않고, 고발하거나 고통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틀어두고”라는 식이다. 시청자들이 언어폭력을 당하고 있는 건데, 일상에서 듣는다면 못 견딜 소리를 TV로 들으면서 푸는 악순환이 현실이다. 그런 영상물을 통한 폭력에는 익숙해져 있으면서도 소설로는 그런 ‘괴로운’ 현실에 대한 이야기는 안 읽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영상물 같은 경우는 소리도 같이 있잖나. 자기가 지르는 것 같기도 하고. 듣다 보면 사람들이 그 톤을 배운다. 그런 TV 프로그램을 계속 보던 사람이 그와 똑같은 톤으로 소리지르는 걸 봤다. 영상은 빨리 지나가니 머리를 작동시키며 상상하지 않아도 충분하고. 그런데 텍스트는 글자를 따라 읽으면서 2차 변환이 일어난다. 각자 경험한 각양각색의 폭력을 떠올리게 된다. 쓰는 입장에서도 난폭한 이야기가 쉬운 건 아니다. 날것의 폭력이 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썼다. 그게 <야만적인 앨리스씨>라는 텍스트에서 나 자신이 보호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무엇을 쓰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에 집중하기.
-어머니의 언어적인 폭력에 노출된 어린 형제가 밤에 나누는 대화 장면이 좋다. 애틋하기도 하고. =형이 동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작품 속에서 아무 맥락 없이 등장한다.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형이 동생에게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형이 동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순간들도 보면, 그 직전에 어머니에게 맞았다거나 하는 때 아닌가. 형제들의 아픔을 담요로 덮어주는 것 같은 이야기들이 필요했다. 형이 동생의 멘털을 보호하기 위해 들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엘리시어 자신에게도 필요한 목소리다. 그 모든 일이 끝난 뒤에, 자기가 빠져나온 그 세계와 별 다를 것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엘리시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이 한권의 텍스트인 거다. 엘리시어는 동생의 이름을 부르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호명하지 못한다. 소설 쓰는 내내 동생의 이름이 뭘까 생각했는데, 생각이 안 나더라. 엘리시어는 끝내 부를 수 없는 거다. 결국 실패한 화자의 이야기에 가까워진 것 같다.
-엘리시어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나. =없다. 그대들이 어떻게 좀 해봐, 하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읽는 사람들, 한권의 책을 펴고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어쨌거나 이런 현실과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고 그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누가 좀 도와줘’ 하는 말도 못하는 엘리시어를 대신해서 내가 ‘그대’를 호명하고 있다는 느낌은 있지만 독자들에게 어떤 태도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이 생각보다 잘 나가고 있어서 좀 불안하다. 대체 어떻게 읽히고 있는 것일까. 혹시 고통에 대한 팬시로 소비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