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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변동은 이미 진행 중

스타 캐스팅과 흥행공식을 거부한 tvN 드라마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

<응답하라 1994>의 1990년대 이야기는 MBC 드라마 <마지막 승부>의 화면으로 시작된다. 성나정(고아라) 가족들은 주연배우 장동건의 농구 실력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도 하고 다슬이(심은하)에 대해 애정을 고백하기도 하며 다함께 왁자지껄 마지막회를 지켜본다. 온 식구가 TV 앞에 둘러앉아 드라마에 대해 수다 떠는 모습은 <응답하라 1994>에서도, 그 전작인 <응답하라 1997>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다. 만화, 게임, 대중가요, 영화, 스포츠 등 많은 장르가 인기를 누렸던 1990년대 대중문화 황금기 안에서도 드라마는 늘 중심에 있었다.

현재의 드라마 환경에서 <응답하라> 시리즈가 환기하는 제일 중요한 의미는 바로 그 드라마의 근본적 가치에 대한 것이다. 때로는 등장인물의 대사 한마디로 설레고 흥분하게 만들고, 때로는 위로와 휴식이 되어주는, 세대, 성별, 출신 지역에 상관없이 모두를 하나로 불러모으는 공감의 장.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는 말이 관용어가 된 이 시대에, 점점 희귀해져가는 그 가치를 <응답하라> 시리즈는 성실히 증명하고 있다. 드라마 전성시대에 대한 꼼꼼한 재현과 함께 무엇보다 작품 자체의 탄탄한 기본기와 완성도를 통해서.

사실 <응답하라> 시리즈는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히트 상품이 아니다. 그보다는 2006년 개국 이후 꾸준히 콘텐츠 자체의 힘에 집중해왔던 tvN 드라마의 역량이 집결된 필연적 결과에 가깝다. 마침 tvN의 개국 시기가, 소위 막장드라마들이 지상파에 등장하는 시기와 맞물리는 것은 흥미롭다. 지상파가 갈수록 외주 제작 비율을 늘리고 시청률 만능주의에 빠지게 되면서 그로 인한 결과물인 막장드라마에 지배당하는 동안, 자체 제작 비율을 늘리고 수익 대부분을 재투자하며 콘텐츠 개발에 힘을 쏟는 tvN의 상반된 추후 행보의 징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상반된 행보의 결과는 특히 올해 드라마 결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지상파가 여전히 막장드라마들과 리메이크 드라마들로 진부한 콘텐츠의 한계를 반복할 때, tvN은 각각 상/하반기 최고 화제작으로 평가받는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이하 <나인>)과 <응답하라 1994>를 통해 콘텐츠의 힘을 증명했다. 이 두 작품은 스타 캐스팅과 검증된 흥행공식에 의존하는 지상파 드라마들의 반대편에서, 신선한 구성과 이야기라는 드라마의 기본기야말로 작품 성공요인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같은 타임슬립이라는 소재를 사용해도, 그것을 액션 스릴러, 신파 멜로, 복수극, 추리극 등 온갖 장르 탐험의 여정처럼 풀어낸 <나인>의 참신한 시도와 결국은 로맨스로 귀결되고 마는 KBS <미래의 선택>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더욱 뚜렷하다.

올해 지상파 드라마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들 역시 이러한 tvN 드라마의 미덕을 공유한 작품이라는 점도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미니시리즈 중 평균시청률 1위작 SBS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시청률 5%에서부터 출발해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한 KBS <비밀> 등이 대표적 사례다. 이들 작품에는 톱스타들로 포진된 화려한 캐스팅도, 스타 작가도 없다. 대신 복합장르라는 신선한 구성을 내세운 치밀한 극본이 있다. 장르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편성받지 못했던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일본 드라마 리메이크작인 MBC <여왕의 교실>과의 정면승부에서, 신인 작가라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한 <비밀>이 신데렐라 로맨스를 자가복제한 스타 작가 김은숙의 SBS <상속자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와의 맞대결에서 각각 승리를 거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다시금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힘이다. tvN 드라마의 성장과 앞서 예를 든 지상파 드라마의 성공사례는 그 점을 확실히 일깨워준다. 올해 지상파 3사가 9년 만에 단막극을 부활시키고, 복합장르적 성격의 실험적 드라마들을 편성하는 등 다소나마 변화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그러한 인식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거기가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의 시대가 정말 응답해야 할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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