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그때가 좋았지’, ‘그때는 이랬는데’ 같은 말을 자주 한다는 걸 깨닫고 씁쓸해진 적이 있다. 그때도 괴롭고 슬프고 지겨운 시간이 있었을 텐데 기억에서 좀 흐려졌다고 ‘좋았던’ 과거만 뒤돌아보는 건 그때의 나에게도 지금의 나에게도 좀 미안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살씩 더 먹을수록, 먼 추억은 힘이 세다는 걸 느낀다. 지난해에 본 영화는 제목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데 중학생 때 본 드라마는, 친구와 주고받았던 편지 속 구절들은, 짝사랑했던 소년과의 짧은 마주침은 아직도 생생한 걸 보면 말이다.
지난해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 이어 돌아온 <응답하라 1994>에 어김없이 낚이는 나 자신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첫회부터 MBC <마지막 승부> 주제가의 전주인 “빠바밤 빰빰 빰빰 빰빰 빠밤~”이 흘러나오는데, <응답하라 1997>에서 성시원(정은지)이 <전사의 후예> 춤을 출 때처럼 자동적으로 피가 끓어오른 건 1990년대를 살았던 세대로서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형성한 덕분이었다. 당시 내가 <마지막 승부>와 연세대 농구부에 미쳐 있던 빠순이였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부모님이 TV 금지령을 내리자 <마지막 승부>만은 보게 해달라며 읍소하고, 학원 끝나자마자 뛰어와 농구대잔치를 본 다음날엔 반마다 한두명 있던 고려대 농구부 팬과 신경전을 벌인 건, 94년에 보편적인 소녀의 모습이었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하지만 <응답하라 1994>의 주인공들은 그 시절 내가 세상 누구보다도 부러워했던 ‘연세대’ 학생들이고, 이상민 팬 성나정(고아라)과 서태지 팬 조윤진(민도희) 등 삼천포, 순천, 괴산 등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새내기들의 낯선 서울살이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MBC의 <남자 셋 여자 셋>을 비롯해 90년대 후반의 청춘 시트콤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이미 진부해진 이 설정조차 시간을 과거로 돌려놓음으로써 새로운 재미의 바탕이 된다. 가족의 품을 떠나 처음으로 남과 같은 방을 쓰게 된 갓 스무살 남자아이들의 투닥거림과, 하숙집으로 “나라님도 못 덮어봤을 두껍고 좋은 이불”을 지어 보낸 어머니의 정성은 애틋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게다가 <응답하라 1997>에서 소년만화와 순정만화의 감수성을 효과적으로 다듬어 보여주었던 제작진은 전작과 상당 부분 겹치는 몇 가지 장치 안에서도 매력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노련함을 보인다. 시원이 죽은 언니 애인의 남동생이자 소꿉친구인 윤제(서인국)와 사랑에 빠졌던 것처럼 나정은 죽은 오빠의 제일 친한 친구로 남매처럼 자라온 ‘쓰레기’(정우)에게 어느 날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요약해놓으면 이토록 뻔해 보이는 설정이 설레는 로맨스가 될 수 있는 건 뻔하지 않은 캐릭터와 감정을 섬세하게 따라가는 흐름 덕분이다. 여주인공에게 주어진 병력이 암이나 백혈병, 기억상실증이 아니라 허리 디스크라는 설정으로부터 부모의 마음과 주변인들과의 관계, 코믹한 상황을 자연스럽게 등장시키고 ‘쓰레기’의 다정한 스킨십으로 정점을 찍는 내공은 이 시리즈가 그저 추억에만 기댄 안이한 속편이 되지 않을 것임을 믿어보게 만든다. 무엇보다 서울에 혼자 올라온 ‘삼천포’(김성균)가 하숙집을 찾아 종일 헤맨 끝에 택시를 탔지만 기사가 시내를 빙 돌아가며 바가지를 씌우고 있을 때 황망하고 불안하고 외로워 보이던 ‘삼천포’의 표정과 함께 MBC <서울의 달> O.S.T <서울 이곳은>이 흘러나오는 순간, 무엇을 노렸는지 알면서도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α
2013년 현재, 나정이의 남편은 누구일까?
‘삼천포’, ‘해태’(손호준), ‘빙그레’(바로) 등 하숙생 모두 먹고살 걱정 없는 지역 유지 아들인 데다, 대학야구 최고 에이스인 서울내기 ‘칠봉이’(유연석)까지 유력 후보로 떠올랐지만 그래도 아픈 나정이에게 툴툴대며 과자 사다주는 ‘쓰레기’ 오빠에게 한표를 건다. 무심한 경상도 남자, 하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할 정우씨, 영화 <바람>의 ‘짱구’ 시절부터 정말 좋아합니다. 절대 거짓이 아니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