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아버지의 그늘에서 무기력한 반항을 일삼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고 만 남자. 애인의 고시공부 뒷바라지를 하다 그의 검사 임용 뒤 배신당하는 여자. 재벌 2세는 곧 배신당한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는 언젠가 복수를 하겠지. 하아, 우리는 이미 이와 유사한 설정으로 ‘만렙’을 찍은 드라마를 알고 있다. 김수현 작가의 <청춘의 덫> 말이다. 성급한 실망을 감추지 못한 까닭은 신인 작가의 미니시리즈 입봉작이 너무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탄식과 실망에 답하는 KBS 드라마 <비밀>의 유보라•최호철 작가는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알아요. 하지만 우리 그렇게 쉬운 사람들이 아니랍니다.”
‘비밀’의 시작은 비오는 날이었다. 강유정(황정음)이 단골 카페에서 애인 안도훈(배수빈)에게 청혼을 받던 그때, K그룹 장남 조민혁(지성)을 사랑했던 서지희(양진성)는 민혁과 자주 들렀던 그곳에서 유정과 도훈 커플의 행복한 시간을 바라보다 쓸쓸하게 돌아섰다. 이들의 다음 만남은 교통사고 현장이었다. 도훈이 운전한 차가 빗길에 미끄러져 드럼통을 받았고, 현장을 확인한 도훈은 도로에 쓰러져 있는 여자에 관해선 입을 다문 채로 유정을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 상황의 심각성을 몰랐던 유정은 갓 검사 임용된 애인이 뺑소니 누명을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자신이 운전을 했다고 진술하고, 조민혁은 사랑했던 여자가 임신한 채로 숨을 거둔 분노를 유정에게 쏟아붓는다.
<비밀>은 줄거리 요약이나 독립적인 장면 하나가 화제가 되는 드라마는 아니다. 극본과 연출이 어떤 사건을 두고 게임을 벌일 때. 보통은 시청자나 등장인물 한쪽에 베일을 드리워 긴장을 조성하는데, <비밀>의 주요 사건들은 양쪽 모두에게 모호한 신호를 던진다. 자기가 운전한 차가 정말 드럼통만 받은 건지, 여자를 친 건지 도훈은 확신할 수 없다. 또한 민혁은 연인의 죽음이 단지 유정 때문인지 아버지(이덕화)가 관련이 있는지 갈등한다. 유정이 감옥에서 낳아 키우다 보육원으로 보내진 아이의 생사에 관해 도훈의 어머니(양희경)만 아는지, 도훈도 알면서 유정을 위로하는지도 애매하다. 다만 짐작할 뿐. 짐작에서 출발하는 여러 갈래의 길 앞에서 인물의 판단과 행동은 다시 그들의 내면을 읽는 단서가 된다. 애인의 결백을 믿는 유정은 누명을 쓰는 선택을 했고, 민혁은 죽음의 발단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피하려고 유정이 사고 현장에서 도망쳤다는 선명한 사실에 유독 집착한다. 이들 앞에 놓인 비밀은 드라마 바깥의 시청자에게도 사후적으로, 일부분만 공개된다. 선과 악으로 정해진 출구를 놓고 인물들의 선택을 내려다보는 시야도 주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인물의 균열과 이전의 선택을 추측게 하는 말 한마디, 표정 하나까지 흘려보낼 수가 없게 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실은 말이야’라고 운을 떼는 상대를 눈앞에 두고 그의 복심을 읽거나 진술에 포함된 부사와 형용사의 선택에서 악의나 머뭇거림을 짐작하듯, <비밀>에는 수면 아래 감춰진 윤곽을 그리면서도 서로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순간들이 촘촘하다. 도훈의 어머니가 아들의 선 자리를 물색하는 전화를 대신 받았던 유정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애인의 부모 앞에서 모른 척 저녁상을 차려 사과까지 깎아냈고, ‘열여섯에 감옥에서 낳은 아이를 입양 보냈다’고 고백하며 동병상련의 공감을 기대했던 유정의 동료 죄수는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지’라고 답한 유정의 곁에서 어색하게 웃는다. 앞으로의 관계를 위해, 혹은 정색했다간 바닥이 드러날까 입을 다물고 때로 앙심을 품게 되는 진짜 비밀의 싹이 돋아나는 순간들. 제목이 괜히 ‘비밀’이 아니었다.
+α
배경음악이 없다
아버지(강남길)의 장례를 치르고 도훈에게 이별을 고한 유정이 방에 돌아와 아버지의 점퍼를 부둥켜안고 흐느끼는 6회. 그녀의 호흡이나 점퍼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독 귀에 서늘하게 박힌다. 대략 4분 동안 배경음악이 깔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방에 오도카니 앉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여자의 쓸쓸함을 생각해보면, 배경음악을 일부러 뺐다는 쪽으로 심증이 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