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에 걸린 아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액션히어로 썬더맨으로 변신하는 아빠 주연(오정세)의 무용담을 그린 <히어로>는 “아이와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으로 십년지기 친구 오정세와 의기투합한 김봉한 감독의 입봉작이다. “시시하다고 욕하는 사람이 있을진 몰라도 최소한 이 영화를 보고 상처받을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사람 좋게 웃는 감독의 모습에서 영화의 성격까지도 짐작할 수 있다. 허당이지만 자랑스러운 한국형 액션히어로를 탄생시키기까지 김봉한 감독이 풀어놓은 고생스럽지만 정겨운 제작기에 귀기울여봤다.
-‘아빠 영화’가 대세인가보다. =요즘 아버지를 다룬 영화가 많지만 성격이 다 다르니 상관없다. <히어로>는 팀 버튼 영화의 정서에 기대는 영화다. 팀 버튼이 아이를 가졌을 때 <빅 피쉬>를 만들지 않았나. 일생 동안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하는 시간은 얼마 안된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본 첫 번째 영화는 <취권>이었고, 두 번째로 함께 본 영화가 <히어로>다. 그 시간 중 단 5분이라도 떠올리면 함께 행복해할 만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주연은 아버지에게서 빌려온 인물인가. =우리 아버지는 주연처럼 다정하지 않았다. 이런 아버지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바람을 담아 주연 캐릭터를 만들었다. 어릴 땐 아버지를 무서워해서 돌아오시는 차 소리만 나도 숨어버리곤 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는 지금도 새벽 네시 반에 일어나 농사일을 하신다. 빨간 날? 당연히 없다. 그런 면이 바로 아버지들이 가진 초능력이 아닐까 싶었다.
-‘허당 히어로’ 썬더맨이 고생하는 걸 보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5학년짜리 아들이 있는데 <아이언맨>의 광팬이다. 썬더맨은 어떠냐고 했더니 좋다고 해줬다. 속으로는 안 좋아하면서 날 배려해주는 것 같다. 번개를 자유자재로 쓰는 주연의 초능력은 제우스에게서 빌려온 거지만 징벌보다는 하늘의 계시 같은 느낌을 의도했다. 우리네 아버지 같은 인상을 줬으면 해서 일부러 낡아 보이는 코스튬을 입혔다.
-인물들이 게걸스럽게 먹는 장면이 많다. =철민이 형이 그렇게 과하게 드실 줄은 몰랐다. 눈에 실핏줄 선 걸 보면 알겠지만 고추냉이도 실제로 무지하게 드셨다. 가짜로 만들어도 됐는데 직접 먹겠다고 하시더라. 철민이 형이 연기한 장면들이 제일 많이 삭제돼서 너무 아쉽다. 하지만 전체 관람가용으로 쓸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배우들 이름만 봐도 애드리브가 넘쳐나는 현장이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정세는 십년 이상된 친한 친구다. <남자사용설명서>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생각대로 잘해줬다. 특히 한번에 가야 했던 머리 깎는 신이 대단했다. 사실 현장은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서 정신이 없었다. 제작비 대부분을 CG에 써야 해서 아침엔 주먹밥, 점심엔 김밥, 저녁엔 사발면만 먹었다. 비 장면을 위해 물을 막 뿌려댔는데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조명기가 넘어져 누전 사고가 날 뻔하기도 했다.
-캐릭터들의 이름에서 그리스 신화를, 신목(神木)에선 제주 신화를 연상할 수 있다.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빌려온 게 맞다. 제주는 신이 많은 곳이다. 영화에서 주연이 소원을 비는 본향당 신목은 서낭당과 비슷한 개념이다. 남자들이 배타러 나가 많이 죽기때문에 제주엔 여자가 많다. 그래서 제주 여인들은 억세고 강인한 면모가 있는데 오정세보다도 키가 큰 황인영에게 그런 모습을 기대했다. 제주가 갖는 환상적인 느낌이 잘 전해졌다면 좋겠다. 아버지가 놓인 현실과 아들이 바라보는 판타지가 영화에서 모호하게 겹치길 바랐다.
-차기작은.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를 다뤄보고 싶다. 범인을 다 밝히고 시작하는 스릴러를 해보고 싶었는데 범인을 다 밝히면 어떡하냐고 주변에서 말렸다. 준비 중인 가족영화도 있다. 동양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고, <히어로>보다는 무거운 분위기다. 이르면 내년쯤 진행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