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에 같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여자가 남자의 집에서 술 한잔하자고 전화를 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쪽에 관심이 있다는 신호일까? 그저 착각인 걸까? ‘남자들이 하는 여자 이야기’ JTBC 토크쇼 <마녀사냥>의 한 코너인 ‘그린라이트를 켜줘’에 나온 상담자의 사연이다. MC들이나 시민들의 의견은 굳이 남자가 혼자 사는 ‘집에서’ 마시자고 했다는 대목에 주목해 여성의 적극적인 신호로 해석하는데, 머릿속에는 빨간 경고등이 깜빡인다. ‘3년 만에 연락? 다단계 권유 아냐?’ 사실 뭐가 맞는지는 알 수 없다. 파트너가 있으니 심정적으로 연애시장에서 철수하고 제품개발에도 소홀한 지 오래인 나 같은 자의 사고는 부정적인 의문에서 출발할 테고, 로맨틱한 이는 저 3년에 애틋한 사정을 채워넣을 수도 있다. 권태로운 사람이라면 만남 이후의 에로소설을 집필할 수도 있겠지. 확실한 것 하나는 일상생활에서 오가는 지인의 상담에 ‘다단계’ 따위의 말을 지껄이며 현실의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된다는 정도랄까. 이런 화제의 재미는 서로의 밑천을 슬쩍 까 보이는 이런저런 상상과 변수를 산만하게 펼쳐놓고 함께 웃고 떠드는 거니까.
<마녀사냥> 역시 그렇다. 첫 방송에서 신동엽, 성시경, 샘 해밍턴, 허지웅, 네명의 MC는 프로그램의 포맷과 정체성에 관해 수런거리며 남녀관계나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화제로 삼아야 하는 부담감을 내비치더니, 곧 봇물 터진 듯 수다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마성의 여자’와 연애하다 난감한 지경에 처한 남성의 사연이나 반대로 남자 때문에 속이 타는 여성의 사연을 놓고 상담하는 코너 ‘너의 곡소리가 들려’와 상대방이 보내는 신호가 연애사인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그린라이트를 켜줘’, 영화나 드라마의 캐릭터를 고발하고 패널들과 유혹의 기술에 관해 이야기하는 ‘허지웅의 고것이 알고 싶다’(8회부터 잠정 폐지)까지. 화제는 별 새로울 것 없는 남녀관계의 보편적인 고민에서 출발하지만, 성적인 뉘앙스를 걸러내지 않고 서로 받아치며 확장하는 이야기는 어느덧 국보 제29호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에 가닿기도 한다(‘귓가에 종이 울리는 것 같다’는 표현을 확장해 좋은 섹스는 귓가에 ‘에밀레~’ 하는 종소리가 들린다던 허지웅의 말).
네명의 MC 모두 디테일에 강한 점도 이들이 종종 벌이는 설정극의 궁합이 척척 맞는 요인이다. 공중파에서도 거부감 없이 ‘섹드립’을 풀어내는 진행자 신동엽은 구체적인 상황설정의 질문을 거듭 던지면서도 ‘선을 넘을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타는’ 메인 MC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 영화평론가 허지웅은 발언수위에 브레이크를 거는 대신 제작진의 편집에 맡겨버리고 ‘여자의 생리 시작 즈음에는 묵은 변비가 해소되는 때라 애인이 화장실에 가면 TV 볼륨을 높여준다’는 등 새삼스럽게 감출 필요 없는 화제를 툭툭 던져놓는다. 감성 발라드 가수 성시경은 만화영화 <꼬마 자동차 붕붕>의 주제가 중 ‘우리도 함께 가지요’ 부분의 뉘앙스를 깊이 음미하는 남자가 되었다. 다른 MC들의 발언에 “잘한다~”, “좋다~” 등의 감탄을 섞으며 상상에 잠긴 그의 표정은 성적인 화제에 대한 감수성 역시 높은 ‘욕정 발라더’라는 별칭을 낳았다. 방송인 샘 해밍턴은 호주 출신 백인남자와 한국에서 11년간 산 호주사람의 위치를 오가며 감정이입의 다른 층을 만들어낸다.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동안 편집된 부분이 있음을 주지시키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점도 영악하다. 어쨌거나 <마녀사냥>을 보고 있으면,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시답잖은 화제로 탈진할 때까지 수다를 떨고 싶은 기분이 되더라. 맥주 곁들여서, 당연히 무편집버전으로.
+α
그린라이트? ‘노 피어’!
야구에서 ‘그린라이트’는 누상의 주자가 벤치의 지시 없이 자신의 판단으로 뛸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그런데 타인에게 자신의 매력과 가치를 전시하고 확인받는 과정에서 오는 적당한 긴장과 만족감만을 취하며 신호만 채집하러 다니는 연애상담 글이 인터넷에 바글바글하더라. 정작 출루한 뒤엔 견제가 두려워 꼼짝하지 않는 주자처럼. 이 신호가 그린라이트인가 아닌가 묻는 상담들에 ‘제발 만나라’고 호소하는 신동엽의 말에 롯데 자이언츠의 지난 감독 제리 로이스터의 메시지 ‘No fear’가 떠오른다. 야구든 연애든 그편이 훨씬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