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ography
<관상>(2013) <불꽃처럼 나비처럼>(2008) <궁녀>(2007) <왕의 남자>(2005) <효자동 이발사>(2004)
<관상>은 개성 강한 배우들의 격전장이다. 속세를 떠나 있다 한양으로 가는 관상가 내경(송강호)과 처남 팽헌(조정석), 옷매무새만으로 내경을 한양으로 유혹한 것이나 다름없는 기생 연홍(김혜수), 그리고 주도권을 쥐고 대립하는 김종서(백윤식)와 수양대군(이정재)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개성은 ‘관상’과 ‘의상’으로 드러난다. <왕의 남자>(2005)를 시작으로 <궁녀>(2007), <불꽃처럼 나비처럼>(2008) 등 역시 개성 강한 사극들을 작업해왔던 심현섭 의상실장은 캐릭터들 제각각의 매력을 조화롭게 조율한 장본인 중 하나다. “김혜수나 이정재는 실제로도 최고의 패셔니스타들이어서 자기가 입을 의상에 대한 눈높이도 상당한 배우들이다. 6개월 내내 미학과 무게감 모두를 고민했다”는 그는 “영화 제목이 <관상>이라 바스트 숏으로 얼굴 위주로만 갈 때가 많아서 속으로 투정도 좀 부렸다”며 웃는다.
‘의상감독’이라는 직책보다 여전히 ‘실장’으로 불리길 원하는 심현섭은 지금도 자신이 ‘프리랜서’라 느낀다. 극단 ‘미추’ 손진책 감독의 여러 작품에서 의상을 맡는 등 공연, 무대의상 작업에 매진해왔던 그는 영화의상이 아르바이트라고 여겼다. ‘사극 전문’으로 생각되는 최근의 필모그래피와 달리 SF영화 <예스터데이>(2002)로 영화계와 연을 맺었지만, 잠시 일손을 빌려주는 수준이었다. <효자동 이발사>를 거쳐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작품이나 다름없는 <왕의 남자> 역시 ‘그 원작인 연극 <이>를 하고 싶어 했던 마음이 반영된’ 작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위치를 규정짓는 것일까. “모처럼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작업에 참여했는데, 기존에 함께하던 사람들도 많이 바뀌어서 그런지 ‘저 사람이 왜 공연하러 왔지?’ 그런 느낌으로 보더라. (웃음) 그러면서 권유진 선배님(<청풍명월> <최종병기 활> <광해, 왕이 된 남자> 의상감독)도 먼저 연락을 주시고 그러니, 나도 이제 영화인인가, 하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열심히 ‘다작’을 하고 싶다.”
아르바이트처럼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그도 어느덧 충무로 10년차가 됐다. “2년에 한편 정도 하니까 후배들이 힘들어했다. 나야 연극이나 강의 등 다른 일들이 있지만, 팀원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내가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정예 팀을 꾸려서 믿을 만한 후배들과 계속 가면 어떨까 한다”는 그는 이제야 프리랜서라는 꼬리표를 떼고 비로소 ‘팀’을 꾸릴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런 점에서 <관상>은 흔한 말로 그의 ‘새로운 시작’이라 할 만하다. “영화의상은 캐릭터의 감정에 복무해야 한다”는 말도 어렴풋이 깨달았다고 느낀다. “기생들의 의상은 정말 싸구려 소재를 썼다. ‘왜 사극 의상의 옷감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느끼는 걸까?’라는 고정관념을 버리니까 화면의 효과가 극대화됐다”고도 덧붙인다.
그렇게 <관상>은 심현섭 실장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억될 것 같다. 최근에는 그런 새로운 시작을 부추기는 경험도 있었다. “<관상>까지 끝내고 뒤늦게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2006)를 봤는데 일주일 동안 열댓번은 본 것 같다.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영화의상의 방향성이 거기 있었다. 비린내, 썩은 내, 그리고 향수, 진짜 영화의상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며 아직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그는 업계에서 이른바 ‘조선판 <색, 계>’라 부르는 안상훈 감독의 <순수의 시대>에 참여할 예정이다. 그가 만들어낼 영화의상의 향수를 빨리 느껴보고 싶다.
PILOT 포리-X 샤프심
아무래도 아날로그 인간이라 그런지, 디자인은 대부분 손으로 직접 다 한다. 내가 특별히 도구에 민감한 사람은 아닌데, 이상하게 노란색 케이스에 담긴 ‘PILOT 포리-X 샤프심’이 아니면 일하기가 힘들다. (웃음) 뭔가 선이 뻑뻑한 것 같고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오래된 물건이어서 요즘에는 팔지 않는 곳이 많다. 그래서 파는 곳이 있으면 몇통씩 사둔다. 내가 작업하는 공간의 테이블 위나 서랍 속, 그렇게 손닿는 모든 곳에 이 샤프심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안심하고 일할 수 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