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김기덕 영화는 대중적으로는 힘들었잖아요. 조재현씨가 나온 <피아노> 덕분인지, 아니면 드디어 김기덕 영화가 대중성을 얻은 것인지, 그건 좀더 기다려봐야겠지만, 관객의 호응에 대해서는 축하를 드립니다. 기분이 어떠세요?
기분은, 별로 변화가 없어요. 지금까지 56만명이래요, 그저께까지.(이 인터뷰는 2002년 1월30일 오후에 진행되었다) 마무리되면 60만명은 될 거예요. 그중에서 40만명은 내 영화에 적응하지 않으려는 관객일 것이고, 그중의 삼분의 일, 20만명 정도는 앞으로도 내 영화에 적응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시장은 커졌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 20만명을 얻기 위한 재료로 조재현이 물론 쓰이긴 했지만, 김기덕이라는 이름만으로 기웃거릴 만한 사람이 20만명은 생긴 거죠. 하지만 삼분의 이, 그러니까 40만명은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김기덕 영화에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돼버린지도 모르죠. 그래서 기분은 별 변화가 없어요.
유곽의 삶, 여느 곳의 일상과 다름 없다
여기 용산 유곽의 거리에서 인터뷰를 하자는 제안은 제가 했습니다. <나쁜 남자>의 무대이기도 했던 유곽이라는 장소에 대해서 당신이 갖는 인상은 어떤 것인가요?
여긴 어느 곳의 삶이나 다름없어요. 유곽의 삶이라는 것이 낮과 밤을 똑같이 만들고, 저는 그 사람들의 일을 삶이라 보고 있는 것이거든요. 물론 저도 살면서 그곳에 가 있었을 때도 있었을 것이고, 또 앞으로도 이 추운 세상을 살면서 어떤 것을 위로받기 위해 그곳에 놓여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공간에서 캐릭터를 꺼내온 것은, 그들에게야말로 누구보다 큰 삶의 떨림이 있을 것이다라는 것. 저는 내 영화에 그걸 빌리는 거죠. 재료인 거죠. 재료일 뿐이라는 의미에서 재료가 아니라.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매춘하는 것에 대해 일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일이라고 생각하나요?
저도 예전에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마치 나에게 놓여져 있는 삶이라고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들어가 아무 부끄럼 없이 일했거든요. 그랬던 때하고 지금하고는 사실 다른 거는 있어요. 갈등의 원인을 덮여놓고 그것을 인생이라고 치면 성철 스님 말씀처럼 산은 산이지 않을까. 그냥 놓여 있는 게 아닐까. 그 사람의 노력여부에 상관없이 놓여 있다면 그건 삶이지 않을까. 삶이면 일이지 않을까. 어떤 사람은 자기가 저렇게 사니까 저렇게 살지, 이런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이미 일상이라면 삶이고 일이지 않을까, 라는 것입니다. (정말 정색을 하고) 오늘은 <나쁜 남자> 이야기는 되도록 안 했으면 좋겠는데, 왜냐하면 ‘왜 그렇게 됐느냐, 김기덕의 원래 삶은 이런 것이지 않았느냐’라는 물음으로 자꾸 되돌아오거든요.
<나쁜 남자>의 배경이 유곽이 되니까 당신 영화를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 특히 반대진영에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영화를 돌아보면 70년대에는 유신정권 긴급조치 직후에 김호선 감독이 <영자의 전성시대>를, 80년대에는 광주 이후 이장호 감독이 <어둠의 자식들>을, 90년대에는 3당합당으로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되자 임권택 감독이 <창>을, 유곽을 배경으로 찍었습니다. 유곽을 배경으로 한다는 건 한국사회에는 순결이데올로기가 있기 때문에 특별한 알레고리를 만들어냅니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유곽에 간다는 것은 가장 비참한 어떤 삶으로 보죠. 한국사회 안에 유곽이 있다기보다 한국사회가 있고, 그리고 유곽이 있다는 식인데.
그냥 한마디로 폐차장으로 보는 경향이 있죠.
더 나아가서 한국영화는 이제까지 유곽을 자기 시대의 상징으로 다루었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이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2001년인데) 21세기에 막 들어선 한국사회를, 김기덕 감독이 유곽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대한 감독 자신의 어떤 입장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그냥 자연발생적이다, 김기덕 영화의 이야기나 배경이나 캐릭터는 자연발생적이다, 라고 받아들여지길 바랍니다.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이 사회에 자꾸 주어지는 편견에서 비롯된 분리된 사회제도에 대한 물음이기도 해요. 제가 비제도권 출신인 건 다 아는 사실이고, 그러나 저는 제도권, 비제도권이라는 분리된 생각을 되도록 희석시키고 살려고 하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이 그런 게 기준이 돼요. 사실 김기덕이라는 사람을 보는 시선도 그래요. 제 학력과 살아온 배경과 이런 걸 밝혔는데, 영화가 아니라 그게 거꾸로 저한테 그런 것으로 돌아오기도 해요. 그들은 그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들은 중심에 있기 때문에. 이런 공간이야말로 중심 밖에 있는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이죠. 저는 영화를 통해서, 이들이 어떤 폐차장으로서의 공간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기본 개념 속에서 그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던 거예요. <악어>가 그랬고, 그런데 100% 그런 것을 다루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 공간을 다루고 있는 것이지. 유곽이 나온 건 두번인가요, 일곱편의 영화 중에서. 그런 캐릭터는 많이 보였죠. 조짐은. 흘러서 그곳으로 갈 거라든지 시작하기 전에 그곳에서 왔다든지 하는. 근데 그게 꼭 그것 자체를 보여준다기보다는 그쪽에서 전이된 어떤 사회를 보여주려는 것이죠. 한국사회의 알레고리로 볼 수도 있지만, 저는 그걸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는 거죠.
간접적인 영화, 직접적인 반응
<씨네21> 사이트를 보니까 더이상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그걸 깨게 해서 미안합니다. (실제로 이 이야기를 진행하는 도중 영화사에서 전화가 걸려와서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고 하니까 김기덕 감독은 그냥 일언지하에 그런 거 이제 안 한다고 했잖아, 라고 대답했다)
아니, 이건 인터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남이라고 생각하지. 만남이 근데 번역하면 인터뷰죠?
저는 말을 잘 돌려하지 못합니다.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한 가장 큰 이유는 영화평들이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일 텐데, 그럼에도 지금 <나쁜 남자>를 둘러싸고 온갖 필자들이 말하고 있고. 게다가 당신의 홈페이지에는 많은 글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번 <씨네21>(338호)에 문학평론가 정과리씨하고 정신과 의사 백상빈씨까지 등장을 했는데, 저는 <씨네21>에서 이들의 등장 자체가 흥미진진합니다. 그 무수한 영화평들에도 불구하고 정과리씨를 끌어들인 건 분명히 김기덕의 서사양식이 새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김기덕 영화 속의 이야기구조를 물어본 적이 없다는 의문의 표시일 것이며, 동시에 백상빈씨가 등장한 것은 아마도 이 점에 대해서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데, 당신의 텍스트와 동시에 감독을 병리학적인 관점에서, 또는 정신분석의 관점으로 한번 읽어보겠다는 그런 의도거든요.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느낌이 어떠십니까?
제가 인터뷰 않겠다고 한 이유는, 저는 그 사람들이 쓰는 비평은 그 스스로는 훌륭하다고 믿어요. 제 평가나 타자들의 객관적 평가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들의 평가도 그렇다고 저는 믿어요. 다만 그 속에 비겁함은 없나 이야기는 해주고 싶어요. 그것뿐이고, 제 말꼬리에 잘못된 말꼬리가 붙는 게 싫어요. 제가 지금까지 해온 수많은 인터뷰가, 내가 했던 말조차 굉장히 다른 꼬리를 물고 있다는 걸 제가 어느 순간 느꼈어요. 언어가 나가서 그게 인격적인 공격을 받을 요소는 충분히 있어요. 근데 영화는 어느 정도 그런 걸 가려줄 수 있거든요. 위장이 되는 거고, 그건 객관적으로 영화일 뿐이라고 얘기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했던 말을 바로 따옴표를 따서 앞에 놓고 주석을 다는 것. 그것이 굉장히 무례한 것들이 많아요. 난 그건 싫어요. 예를 들어서 난 심영섭씨가 그랬나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거나, 그런 말투들. 김기덕의 이런 말을 통해서 보니까 이 사람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라는 식. 그런 어떤 변명이 필요없을 만큼 그 이야기는 굉장히 치욕스런 이야기거든요. 내 가족과 우리 엄마는 글도 읽을 줄 몰라요. 하지만 나에게 어머니는 아주 휼륭한 분이셨습니다. 근데 아주 이상한 공기들이 형성이 된단 말이죠. 그분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자식에 대한 애정과는 상관없이. 그런 걸 보면 사실 슬프더라고요. 근데 그런 거를 몇번을 봤어요.
당신에 관한 평들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는 것 중의 하나는, 영화평론가라는 지식인들이 영화를 보고 매우 직접적으로 반응을 한다는 거예요. 영화를 보고 영화 안을 너무 순진하게 믿는다고 할까? 아도르노가 한 말 중에 좋아하는 구절은, “예술은 항상 간접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비평도 언제나 간접적이어야 한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감독 자신이 상당히 간접적인 영화를 만들었는데 보는 사람들은 직접적인 반응을 하고 있다는 거죠.
그게 저는 영화의 존재 이유라고 봐요.
왜 그런다고 생각하십니까. 훈련받았다는 영화평론가들이.
저는 그래야만 제 영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 영화든 누구의 영화든, 그렇지 않으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볼 아무런 재미를 못 느끼겠죠. 그런 태도는 영화에 빠져드는 데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근데 결국은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걸러내야 하는 거죠. 인격적인 모욕 같은 것은 걸러내져야 하는데 그걸 못하는 거죠.
제가 이 질문을 드린 이유는, 그것이 김기덕 감독 영화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본인한테 이건 매우 힘든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홍상수 영화를 보고 나서 그가 처녀에 빠져든 사람이다, 라는 말은 안 합니다. 어쩌면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지 않거든요. (웃음) 그런데 김기덕 영화를 보면 사람에게 직접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어떤 힘이 느껴지거든요. 본인이 힘들어하는 바로 그 부분이 저는 김기덕 영화가 갖고 있는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인정은 해요. 인정을 하지만, 뭐 그것을 제가 맞아요, 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왜냐하면 그건 내 속의 은유이기 때문에. 그건 보는 사람들이 끄집어내 구성화시키는 것이지. 저는 최대한 영화감독들은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어디서 봤거든요. 말이란 것은 자꾸 영화하고 연결이 돼버린다, 삶도 들키지 말아야 하고 생각도 들키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이 철학자고 예술가다, 그런 말이요. 물론 제가 예술가라는 건 아니지만.
예술가인 건, 맞죠. (웃음)
가장 자기 생각을 들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 예술가라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만든 그 직접적인 영화 속에서 내 속의 은유를 보아주었으면 고마울 거 같습니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씨네21>에 실린 정과리씨와 백상빈씨 대담을 오늘 아침에 여기 오면서 읽었습니다. 많이 재밌었어요. 멋진 대목은 정과리씨가 <나쁜 남자>의 거의 대부분의 앞 대목이 한기의 환상이라는 지적이었어요. 대부분의 해석과 반대로 마지막에 트럭타고 돌아다니는 게 실제라는 거죠. 그런데 저는 영화를 보자마자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양쪽이 다 환상인데, 이 환상 속에 한기가 죽어가면서 본 것, 또 거꾸로도. 그러니까 이 영화는 여대생을 창녀로 만드는 추락이 트럭타고 몸팔러 다니는 여자의 기둥서방의 환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여대생을 떠나보내는 한기가 죽어가면서까지도 바라는 희망의 환상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처참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두 가지 환상을 생각했는데. 김기덕 감독께서는 어떤 환상이 더 맞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건 해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중요한 건 한국영화의 담론은 지금 리얼리즘영화와 모더니즘영화밖에 없거든요. 근데 정과리씨 이야기에서 제일 반가웠던 것은 ‘환상’이라는 말을 쓴 점. 즉,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뿐인 이 시대에 환상이라는 요소를 끌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는 발견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신 영화를 좀더 지켜본 다음 얘기해야 할 것이기도 하지만, 김기덕 영화가 일종의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러한 계보에 서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당신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일상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웃음)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정과리씨 얘기가 어떻든 간에. 말하자면 지금 이 자리가 환상일 수 있냐 하는 얘깁니다. 지금 제가 서로 마주 앉아서 얘기하고 있는 이 자리가. 현실과 환상, 두 가지로 다 볼 수 있겠죠. 그렇다면,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니겠죠. 모든 걸 추상으로 본다면. 아까 초반에 말한 것처럼, <나쁜 남자>를 어떻게 해석을 하든 그 사람으로서는 정답이다, 라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웃음)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김기덕 감독께서는 ‘판타지’라는 것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신가 하는 점입니다.
똑같은 얘긴데, 저에게는 살아오면서 고민을 하는 게, ‘이게 꿈이 아닐까’ 반문하는 습관이 있거든요. 꿈이었으면 좋겠다, 라거나.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라거나. 둘 중 하나가 늘 선택이 되고 있어요. 아직까지 저는 솔직히 물리적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구상적 인간. 그런데 사실은 추상적 인간이기를 굉장히 원해요.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내가 태어나고 살아오고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해요. 그건 왜 그러냐면, 물리적으로 사실 살기 힘들거든요. 그건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명예가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종교적이라는 말을 굳이 하자면, 어쩌면 우리는 거대한 그런 것으로부터 시험받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거든요. 제가 미션 스쿨을 다녔고, 교회를 다니면서 여름성경학교 가서 듣는 게 장로교적인 예정론이고. 그런 것에 깊이 세뇌를 당했거든요.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쳐봤고, 결국 빠져나왔어요. 근데 빠져나오고 보니까 또 그것이 사실 중요하더라고요. 그러한 어떤 지점이야말로. 안에 있을 땐 그것이 굉장히 못 견디게 힘든 것이었지만. 그렇다면, 그런 것이 반복되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 두 가지에서 나는 판타지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요.
다시 <나쁜 남자>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논리와 숏의 논리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오히려 영화의 논리와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갖고 숏의 논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점에서 당신 영화는 의아한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이를테면 영화 논리적으로는 한기가 대학로에 가야만 하겠죠. 그런데 신의 논리를 생각한다면, 한기라는 인물이 대학로 갈 이유가 없거든요.
대학로가 아니라 명동!
그런가요? 하지만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그건 악어가 꽃밭에 간 것처럽 보입니다.
왜 가면 안 될까?
거긴 한기에게 불편한 공간이지요. 가서 어울릴 사람도 없고, 정작 본인이 거기서 할 이야기도 없고. 말하자면 역설적으로 선화를 만나기 위해서 갔다고 할까요?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모티브예요. 대립지점이 바로 그거거든요. 가장 큰 대비의 폭이고 모든 사건의 시작의 원인이거든요. 이 사회에서 사실은 저도 그랬어요. 롯데백화점이 지어진 지는 꽤 됐지만, 저는 생긴 지 10년 뒤에 가 봤어요. 왜냐하면 가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거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나 역시 했어요. 우리가 바로 마주하고 있는 공간들이 근데 그런 공간들이에요. 사람들의 공간만 비유되는 게 아니라, 지금 사회는 지리적 공간도 비유가 되고 있거든요. 다시 말하면 사실 크게 다른 것 안에서 둘이 싸우는 거예요. 물리적 가치, 경제적 가치, 이런 걸로 싸운다는 게 말이죠. 그건 마치 내 친척 중에 깡패가 있다는 것과 똑같아요, 다만 모르고 있을 뿐이지. 그런 게 있을 수 있거든요. 지리적 형상들도 사람들 관계와 비슷하다고 봐요. 그래서 저는 한기가 그곳에 못 갈 이유가 없다고 봐요. ▶ 정성일, 인터뷰 거부선언했던 김기덕을 만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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