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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병 걸린 공산주의자의 흡연

경계선을 달리는 하드보일드 작가 대시엘 해밋 Dashiell Hammett

대시엘 해밋은 폐병 환자였다. 1차대전에 참전하자마자 폐병에 걸려 전쟁 때는 병원에만 있었고, 이후로도 병은 죽을 때까지 완쾌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는 입에 물고 살았다. 더 나아가 술을 너무 좋아해서 커피를 마실 때마다 브랜디를 섞는 등 한순간도 손에서 술을 놓지 않았다. 담배 피우는 폐병 환자에 알코올 중독자인 대시엘 해밋은 30대 때부터 사실상 죽음과 동거하는 공포 속에 살았다. 이때 쓴 소설들이 전부 범죄물이고, 이른바 미국 하드보일드 문학의 보석들이다. 하드보일드의 3대 작가로 지금도 제임스 케인, 레이먼드 챈들러, 그리고 대시엘 해밋이 꼽힌다.

그런데 해밋은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작가로 명성을 날릴 때인 40대에 공산주의에 투신한다. 서구 선진국 가운데 공산주의가 거의 싹도 틔워보지 못한 나라가 미국인데, 그렇다면 해밋의 불행한 말로가 약간은 짐작될 것이다. 해밋은 속된 말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자리에서, 스스로 시대의 부조리와 맞서는 ‘위험한 삶’을 선택했다. 말하자면 경계선 위의 삶이었다.

대시엘 해밋의 이름은 영화 <말타의 매>(1941)의 작가로 먼저 기억될 것 같다. 존 휴스턴 감독의 데뷔작이자, 험프리 보가트의 출세작이고, 필름 누아르의 효시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말타의 매’라는 황금 조각을 손에 넣기 위해 사람들이 암투를 벌이고, 그 가운데 희생자들이 속출하는 범죄물이다. 황금에 눈이 먼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몰려드는 데서, 그리고 살해되는 사람들이 대개 황금과는 인연이 먼 하층민들이라는 데서, 세상에 대한 좌파 작가의 통렬한 비유를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훗날 본격적인 공산주의자가 되는 젊은 작가의 이런 사회비판적 스토리도 흥미롭지만 사실 독자들에게 은밀한 매력을 전달하는 것은 해밋의 개인적 취향이었다. 이를테면 양복과 넥타이의 색깔을 맞추려는 주인공 샘 스페이드의 댄디적 감각, 미혼남의 자발적인 고독한 태도, 정성들여 말아 피우는 입담배에 대한 애착, 바카디(Bacardi) 같은 술에 대한 무한한 애정들이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의 밤 풍경은 샘 스페이드의 삶을 미화시키는 최종의 공간이었다.

해밋의 이런 자기도취적인 취향은 1934년 마지막 소설인 <그림자 없는 남자>를 끝으로 자취를 감추고, 대신 그의 이름 앞엔 할리우드 작가들의 리더이자 공산주의 세뇌자라는 별칭이 붙기 시작했다. 실제로 해밋은 1937년 미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1930년대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파시즘의 입장에서 공산당을 지지했듯, 해밋도 당시에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진행되던 파시스트 정권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본격적인 불행은 한국전쟁 중에 최고조에 달했던 매카시즘 때 불어닥쳤다. 그도 1951년 미의회에 불려가 공산당 가입 사실을 인정하고, 동료들의 이름을 불어야 했다. 그러면 경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밋은 의원들의 질문에 전혀 대답하지 않았고, 의원들은 그를 의회모독죄로 기소했다. 그는 실형을 선고받은 뒤 6개월을 감옥에서, 주로 화장실을 청소하며 보냈다. 57살 폐병 환자의 감옥생활, 이때 그의 폐는 돌이킬 수 없게 악화되고 말았다. 뭐라 그럴까? 늘 죽음의 위협 속에 살았고, 감옥생활을 하면 중간에 죽을 수도 있는데, 이때 해밋은 ‘비열한’ 청문회를 겪으며 사실상 삶에 대한 마지막 끈을 놓은 듯 보인다.

해밋은 자신의 이상을 좇다 세속적인 행복을 놓쳐버렸다. 그러나 후배들은 그의 문학적 업적은 물론, 순수한 이상까지 기억하고 찬양했다. 빔 벤더스 감독의 첫 미국 진출작 <해밋>(1982)은 해밋의 열정에 대한 헌정이고, 코언 형제의 <밀러스 크로싱>(1990)은 해밋의 <붉은 수확>(1929)과 <유리 열쇠>(1931)에서 모티브를 따온 갱스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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