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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인터뷰 거부선언했던 김기덕을 만나다 (4)
2002-02-14

“가학적이라고? 난 처음부터 종교적이었다”

<나쁜 남자>의 해병대 남자들이 ‘나쁜 남자’일 수 있다

형제관계는 어떻게 되세요?

2남2녀 중 차남이에요. 위에 형, 누나 있고 밑에 여동생 있고.

저는 장남이거든요. 아버님이 한국전쟁 때 월남하신 분이고 그런 분들은 장남 이데올로기가 있어요. 이를테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저는 집에서 서울말을 쓰면 안 됐어요. 고향에 돌아갈 거니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리고 당신이 제일 싫어하는 말일 수 있지만, 김기덕 영화를 보면 끊임없이 자기 삶에 대한 반추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삶이 주인공의 삶으로 등장한 적은 없어요. 늘 주변부에 등장을 하죠. 예를 들어 <나쁜 남자>에서 한기가 키스를 하고 바로 해병대(해병대복을???) 입은 세명의 군인이 한기를 두들겨패는 장면을 보면서, 아 이 사람은 자신의 지나온 삶이 싫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 쓰고 있는 <해안선>이라는 게 해병대 이야기인데 자학적인 이야기죠. 해병대 출신이라면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라는 말에서, 그 집단을 신뢰해야 하고 앞으로 영원히 그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정신이 있는데, 저는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아요. <나쁜 남자>의 해병대 세 남자는 ‘나쁜 남자’일 수 있어요. 이 사회에서는 좋은 체제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의 면도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 두 가지를 저는 동시에 이 세명의 해병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거죠. 저 자신이 사실은 두 가지 속에서 아이로니컬하게 살아가고 있는 거죠. 이쪽 모습도 보고 저쪽 모습도 보며. 그런데 결국 패는 놈이나 맞는 놈이나 똑같다는 걸 말하는 거죠. 이 영화를 보고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든 ‘김기덕 좆같다’ 하면서 욕을 했든(정성일의 주. 고백하자면 사실 이 인터뷰는 서로 육두문자를 격의없이 섞어가면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정리하면서 나는 내 육두문자만 ‘야비하게도’ 정돈했다. 김기덕 감독님, 용서하세요) 그건 그 사람의 거울이라고 생각해요. 제 영화를 보고 ‘김기덕 이 개 같은 놈’이라고 하면 그 말이 사실은 자기 자신이 제일 먼저 듣는 말이라는 거죠. 미워하든 칭찬하든 그건 자기 거울이라는 거예요. 이 영화가 거대한 스크린이라는 거울이라면 보는 사람마다 거기에 비춰보는 자기 살아온 삶이 다 다를 거 아니에요. 위험한 말일 수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도덕적으로 살아왔다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보면서 ‘개 같은 놈 씨발 놈’이라고 욕을 했다면 그 욕이 그 자신에게 향한다는 거죠. 반대로 이 영화를 보고 ‘아 나는 나쁜 놈이라는 걸 느낀다. 내 자신이 인생을 어떻게 살지 다시 생각을 해야겠다’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착하게 살아왔을 거라는 얘기예요. 사람들은 너무나 다층적이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 관객이든지 간에 그 어느 누구도 비난하지는 못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덕이 폐부를 찌르는 느낌을 줬다고 하는 이들이 있거든요. 그런 게 기쁠 뿐이지 한국의 비평가가 별 네개를 줬다 뭐 이런 것에 감격하지는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저의 많은 것을 부풀리고 있어요. 무엇이 있지는 않을까. 무엇이 없지는 않을까. 그래서 지금은 인터뷰를 안 하겠다고 물러나 있는 거죠. 하지만 오늘 정성일 선생님이 악어처럼 저를 문다고 해도, 어떤 악어에게 물려도 이제는 두렵지 않은 것이, 이미 난 끔찍하게 물려도 그 이빨자국이 남지 않게 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에요. (웃음) 사람들이 각자 차이는 있지만 누가 배로 무겁지는 않은 것과 같은 이치인데, 많은 사람들이 김기덕이 지나치게 커지지 않을까, 대중 앞에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 우려하는 건 말 그대로 지나친 일인 것 같아요. 그러면 내가 가장 불편해져요. 그렇지 않겠어요?

<거짓말>과 <나쁜 남자>

이상한 비교를 하겠습니다. 저는 사실 <거짓말>이 시시하고 지루했어요. 그런데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에서 흥미있었던 것은,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던 평론가들이 갑자기 그 영화에 자기의 틀을 버리고 작가주의 관점에서 지지를 보냈다는 사실이었어요. 사드주의적인 섹스와 마조히스틱한 역할이 교대되는 이 영화에는 관대했던 페미니스트 평론가들이 <나쁜 남자>에 대해서 관대하지 못한 까닭에는 ‘계급의 추락’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남자가 여자를 때리고 여자가 남자를 때리고 그런 섹스의 광경은 참아줄 수 있지만 여대생이 창녀가 되는 계급적 추락은 못 참겠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페미니스트들이 남자가 여자를 때리다가 여자가 남자를 때리니까 평등해졌다고 생각할 만큼 유치하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아요. 아까 김기덕 감독이 ‘수평적 사회’ 이야기를 했지만, 선화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추락이거든요. 저는 <나쁜 남자>를 둘러싼 담론은 반드시 다른 영화들의 담론들과 상호 텍스트의 횡단 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궁금한 것은 그 논리가 아니라 그 추락의 정서가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 어떤 울림을 갖는지가 궁금하네요.

이거는 답변을 안 하면 안 돼요?

불편하세요?

아니, 불편한 건 아니고.

그럼 이 이야기는 오프 레코드로 하고.

아니 그냥 제가 답변을 안 했으면 좋겠어요. 질문으로 충분한 답변이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문현답이었나요?

사람들이 가장 기다렸던 질문이겠죠. 그걸 알기 때문에 그냥 답변을 안 했으면 좋겠어요. 평론가가 여성이건 남성이건 상관없이 그냥 그 사람 관점 안에서 자기 해석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내가 하는 욕은 내가 먼저 들어요. 귀의 울림을 통해서. 아까 얘기했듯이, 이 영화에 대해서 하는 어떤 말도 그 말을 하는 사람 자신이 가장 먼저 듣는 말이라는 말로 답변을 대신하고 싶네요. 그들 스스로가 가장 정확한 해답을 갖고 있다고 믿어요, 내 영화를 아무리 공격해도, 그래도 비난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식물이라고 치면 나무와 풀이 동등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가치에 상관없이.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웃음)

저 삐쳤어요.

하하하.

저는 삐치면 한 10년은 가요.

제가 허우샤오시엔 싫어한다고 해서 삐치지 않았어요?

저도 김기덕 감독이 좋아하는 안드레이 줄랍스키 영화 싫어하는걸요. (웃음) 말 그대로 머리를 여는 영화 있잖아요.

<샤만카>요? 저도 그런 직설화법 영화는 이해 못해요. 그 영화는 이 세상에 내밀고 싶은 네 가지 문제를 얘기하거든요. 지식과 전쟁과 섹스와 전통, 그거였는데, 그게 흥미로웠지, 머리 따고 하는 것은 <한니발>처럼이나 유치하다고 생각해요.

같은 질문을 다르게 해볼게요. 사람은 두 가지 증후 중 하나에 이끌린다고 하는데, 사디즘에 이끌리는 편이세요, 마조히즘에 이끌리는 편이세요?

그건 오해와 이해의 문제예요. 오해는 피학이고 이해는 가학이거든요. 내 주관성을 가질 때는 상대를 설득해야 되고 내가 오해가 있을 때는 나 자신을 질타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성적이든 성적인 것을 떠나서 물리적 행동에서든. 두 가지 다가 제 영화에서는 왔다갔다 해요. 그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 뭐죠?

사도마조히즘.

예전에 어떤 여성평론가가 저의 개인적인 가족적인 공격을 해가지고 답 글을 한번 정직하게 쓴 적이 있어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 영화에서 어떤 것을 보고 당신이 불행해졌다면 용서를 구하고 싶다’ 이렇게 썼더니, 또 마조히스트라고…. (웃음)

사회의 무언가를 아프게 베어내는 영화

이렇게 이야기할게요. 저는 김기덕 영화를 거대 담론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영화가 우리 사회의 무엇인가를 ‘베어내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것이에요. 그것도 아주 아프게 베어내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꾸만 우리는 불편하죠.

저는 찾아낼 건 찾아내고 버릴 건 버리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거죠. 저는 정작 그런 심각한 고민들에서 정말 이 영화가 비롯됐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몰라요, 활자화되어서 나오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정말 그런 심각한 상처에서 영화를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스스로 있거든요. 사람들이 “그러면 네가 도덕군자란 말이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러면 난 또 “그렇지 않다”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나도 남자인데, 성인으로서 내가 모든 백과사전이고 인생의 모든 스트레스를 내가 알아서 처리를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절 영화’(김기덕 감독은 차기작으로 동자승이 노승이 되어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준비중이다)를 만들어서는 안 되겠죠. 모든 걸 섭렵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내가 이 세상을 보는 것은 ‘단(短-單)시각’입니다. 그 짧은 시간과 공간 안에 한국의 정서나 폐단이 없다고 볼 수는 없겠죠. 그런 것처럼 제가 필요없이 우리 사회가 고민했음 좋겠어요. 저는 그게 두려워요. 저도 기승전결이 깔끔한 영화를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제가 그런 영화를 만들면 욕을 먹을 것 같아요. 소위 말하면 희로애락에 기초해서 코미디나 멜로 같은 영화를 애초에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어느날 갑자기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거든요. 제 스스로.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근데 그게 좀 늦게 왔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제가 아직 세상에 대해 의심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오해가 많기를 바라고. 정제되는 것이라거나 위악적인 선택이라거나 이런 것을 떠나서, 저는 그건 참 인정을 해요. 내가 종교적일 수밖에 없는 것을, 저는 남산시각장애인교회에서 오랫동안 있었어요. 그곳에서 한동안 기거를 하며 일을 도왔어요. 종교적 고민을 오랫동안 했고, 이름도 없는 야간학교지만 신학을 1년 정도 공부한 적이 있고, 세상에 필요한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어요. 근데 그걸 멈춘 이유가 내 스스로의 인격이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죄도 아니고 가장 인간의 기본적인 것인데, 저는 그것 때문에 신학을 관뒀어요. <나쁜 남자>의 엔딩 같은 그런 고양된 것을 향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것을 의식하고 공포하는 거였어요. 그런 의식이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멈추게 했어요.▶ 정성일, 인터뷰 거부선언했던 김기덕을 만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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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일, 인터뷰 거부선언했던 김기덕을 만나다 (4)

▶ 정성일, 인터뷰 거부선언했던 김기덕을 만나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