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가 어느덧 천만 관객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지금, 원작자인 장 마르크 로셰트(Jean Marc Rochette, 그림)와 뱅자맹 르그랑(Benjamin Legrand, 글)이 한국을 찾았다. 1970년대부터 자크 로브(글)와 알렉시스(그림)의 구상으로 시작된 <설국열차>는 1977년 알렉시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장 마르크 로셰트가 새로이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기나긴 작업 끝에 <설국열차>는 1984년 드디어 1권 <탈주자>가 세상에 공개됐고 1986년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크 로브마저 1990년 세상을 떠났고, 장 마르크 로셰트는 뱅자맹 르그랑과 함께 후속편을 구상하여 시리즈를 재개했다. 그렇게 2권 <선발대>와 3권 <횡단> 작업이 시작되어 지난 2000년 현재의 모습으로 완결됐다.
두 사람은 <설국열차> 외에도 <백색진혼곡>을 작업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 모두 영화에 카메오 출연했다는 점이다. 장 마르크 로셰트는 영화 속 그림을 그려주는 화가의 ‘손’으로 출연했고, 뱅자맹 르그랑은 수염을 달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꼬리칸 사람들 중 하나로 출연했다. “다시는 영화에 출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웃으며 입을 모은 그들은 인터뷰 내내 ‘봉준호 예찬론’을 펼쳤다.
-자크 로브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어땠나. =장 마르크 로셰트_1983년 1권을 마치고 1990년에 세상을 떴다.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뜬 게 아니라 모두 예상하던 시점이어서 그를 편히 보낼 수 있었다. 자크 로브는 프랑스의 3대 시나리오작가 중 하나다. 다양한 장르의 시나리오를 썼고, 글은 유머러스하면서도 어드벤처가 살아 숨쉰다. <설국열차>는 그의 유일한 ‘대작’이라 할 수 있는데, 출간 당시 철학적이고 심오한 우화라는 점에서 독자들의 반응이 대단했다.
-원작은 서로 다른 3개의 챕터로 이뤄져 있다. 가장 좋아하는 챕터는. =장 마르크 로셰트_옆에 있는 뱅자맹에게 미안하지만(웃음), 자크 로브가 쓴 1권을 가장 좋아한다. <설국열차>를 이루는 세계의 모든 것이 거기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가 나를 그래피스트로 선택해줘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의미도 있다.
-영화 <설국열차>가 원작과 다른 부분들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장 마르크 로셰트_기본적으로 자크 로브의 원작이 지닌 색채와 유사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가장 놀라운 것은 결말이 긍정적이라는 점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다. 또한 주인공이 외롭게 혼자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 뭉쳐 나아간다는 점이 신선했고, 원작에는 없는 틸다 스윈튼 캐릭터가 무척 생기있고 유머러스하게 그려진 점도 좋았다. 존재하지 않던 캐릭터를 그렇게 그려낸다는 건 대단한 발상인 것 같다.
뱅자맹 르그랑_나 역시 마지막 장면이 낙천적이면서도 인류애가 잘 드러나서 좋았다. 무엇보다 아시아 소녀와 흑인 남자아이가 함께 살아남는다는 게 놀라웠다. 또한 곰의 등장까지 굉장히 상징적이었다. 이번에 한국에 오면서 봉준호 감독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바로 그 결말이었다. (웃음)
-두 사람 모두 영화 애호가들이어서 <설국열차>에 출연한 존 허트나 틸다 스윈튼 같은 배우들이 출연한다고 했을 때 무척 반겼을 것 같다. =장 마르크 로셰트_앨런 파커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 심약한 죄수로 출연해 심각한 고문을 당한 주인공을 도왔던 존 허트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감옥을 설국열차의 꼬리칸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오히려 크리스 에반스가 놀라웠다. 캐스팅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나에게는 ‘캡틴 아메리카’로 기억되는 배우인 데다 젊은 세대에게 각광받는 배우였기 때문이다.
뱅자맹 르그랑_존 허트는 당시 시네필에게 ‘아이돌’과 다름없는 배우였다. (웃음) 그래도 나는 존 허트 하면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1980)이 가장 좋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영화였다.
-각자 화가와 작가로서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장 마르크 로셰트_반 고흐를 가장 좋아한다. 한 사람을 더 꼽으라면 인상주의의 선구자라 불리는 프랑스 화가 카미유 코로다. 내 작품의 기본 바탕은 인상주의다.
뱅자맹 르그랑_<보바리 부인>을 쓴 플로베르를 가장 좋아한다. 스탕달과 발자크 등 프랑스의 대문호들도 좋아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추리소설을 무척 좋아한다.
-혹시 좋아하는 프랑스 영화인들을 더 물어본다면. =장 마르크 로셰트_<공포의 보수>(1953), <디아볼릭>(1955) 등을 만들며 히치콕의 라이벌로 불렸던 앙리 조르주 클루조다. 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피카소의 비밀>(1956)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뱅자맹 르그랑_<천국의 아이들>(1945), <테레즈 라캥>(1953) 등을 만든 마르셀 카르네를 좋아한다.
-기자회견과 인터뷰를 통해 <설국열차>에 대해 격찬을 쏟아냈다. (웃음) 혹시 원작자로서 얘기하고 싶은 아쉬운 점은 없나. =장 마르크 로셰트_비단 <설국열차>뿐만 아니라 세상 그 어떤 영화든 영상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캐릭터와 이야기에서 어떤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존재하는 이미지를 카메라로 담아내는 영화는 필연적으로 본래의 시적이고 영적인 분위기를 얼마간 훼손하면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영화가 시나 문학이나 회화보다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애초의 ‘마술’적인 상황보다 ‘현존’이 더 앞서게 되는 건 영화의 당연한 이치다.
뱅자맹 르그랑_정말 나는 완벽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영화 보는 눈이 무척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점이다. (웃음) 미술이나 조명 등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따져 묻는 사람인데 <설국열차>는 어느 하나 거슬리는 게 없었다.
-봉준호 감독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장 마르크 로셰트_프랑스 관객은 영화의 이야기나 장면 구성에서 클래식한 면모를 굉장히 따진다. 그런 점에서 봉준호의 영화들은 그런 클래식한 느낌이 좋다. 그의 이전작 중 <살인의 추억>(2003)이나 <마더>(2009)를 무척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영화가 생각났던 기억이 있다.
뱅자맹 르그랑_동의한다. 그의 영화는 시적인 면과 드라마틱한 면이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풀어나가는 면은 진정 탁월하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특유의 유머다. 나는 유머야말로 예술가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영화 <설국열차>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무엇인가. =장 마르크 로셰트_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열차 안의 사람들과 열차 바깥의 얼어 죽은 사람들이 교차되며 보이는 장면이다. 그저 흘러가는 장면인데도 내부와 외부가 대비되며 유머와 폭력이 공존하는 장면이었다.
뱅자맹 르그랑_꼬리칸에서부터 악전고투하며 드디어 엔진실에 다다른 크리스 에반스와 에드 해리스가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원작에는 없는 장면이기도 한데, 물리적인 결투가 아니라 그 말을 통한 ‘충돌’의 양상이 좋았다. 그러고보니 장은 화가라서 이미지를, 나는 작가라서 이야기를 고른 것 같다. 아마 그런 상반된 점 때문에 우리 둘의 호흡이 좋은 것 아닐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