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과 분당을 지역구로 둔 국회의원, 그리고 이마트 등 현실의 드라마가 굉장히 세다. 특히 분당 국회의원은 최고의 악역(?)이라 할 만하다. =실제 지명을 최대한 쓰려고 했다. 분당시나 이마트쪽과 협조가 잘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실제 고유명사뿐만 아니라 대한대학, 한국전자 등이 마구 섞여 있다. (웃음) 국회의원 같은 경우는 손학규 의원이 영화인에게 우호적이라 허락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제작 중간에 국회의원이 바뀌긴 했지만 성남시청의 도움으로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개별적인 정치적 맥락보다는 위기상황에서 벌어지는 광의의 정부쪽 대처를 묘사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분들이 위기상황에서 우리가 바라는 대로 멋지게 행동해줬으면 하지만 한반도에서 유사 이래 과연 그랬던 적이 있었나 싶다. 그래서 그런 쪽으로는 회사건 개인이건 다들 좀 대범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서울을 향해 진군하는 분당 시민 시위대의 모습은 거의 정치영화의 한 단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발포 명령을 둘러싼 여러 정황이 지난 한국사를 들춰보게도 하는데 박일현 미술감독은 <화려한 휴가>(2007)의 미술을 맡기도 했다. 여러모로 현실을 환기시키는 지점들이 많다. =해석하는 사람들의 입장과 태도에 따라 여러 견해가 있을 것이다. 어쨌건 나로서는 시위장면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게 지난 2011년 이른바 ‘아랍의 봄’에 영향을 받은 이집트의 대규모 유혈사태와 북아일랜드의 신교도 폭동이었다. 당시 휴대폰으로 찍은 영상들이 많이 돌아다녔는데 이모개 촬영감독과 함께 꽤 치밀하게 분석했다. 그런 혼란스런 영상을 스크린으로 재현해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올드한 감독이다 보니 막 흘려 찍게 되진 않더라. (웃음) 장면에 대한 설명이나 인과관계를 충분히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360도로 카메라가 회전할 때도 보다 자연스럽고 정보를 놓치지 않게끔 했다. 말 그대로 사실감을 극도로 추구하되 그저 ‘사건 재연’처럼 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모개의 능력이 출중했다. 현장을 진짜 날아다녔다. 정두홍도 현장에서는 나한테 체력적으로 밀리는데, 그런 내가 이모개한테는 졌다. (웃음)
-영화 속 분당의 모습을 보면서 막연하게 <무사>(2001)의 고립된 해안 토성이 생각나기도 했다. 고려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떠났다가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했던. =내가 좀 그런 극단적인 한계상황을 좋아하는 것 같다. 현실이 심심하니까. (웃음) 인물들을 그렇게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데서 오는 긴장감을 좋아한다. 바로 그때 인물들의 본성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 극한의 상황에서 지구(장혁)와 인해(수애)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지구는 거의 바보처럼 착하고, 인해는 이기적인 모성애를 드러낸다. =이야기 전개의 개연성이라는 측면에서 투자자나 프로듀서로부터 장혁 캐릭터에 대한 지적을 많이 받았다. 사실 인해에 대해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니 왜 저렇게 큰 위험을 감수하냐고. 이런 말이 성립될지 모르겠는데, 실제 그게 장혁의 모습이다. 필요 이상으로 솔선수범하고 남을 배려하는 말 그대로 ‘진짜 사나이’ 다. (웃음) 재난영화를 장르로서 다뤄야 할 감독 입장에서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지적을 당할 때마다 나를 믿어달라, 설명하지 않고 그렇게 밀어붙여보고 싶다고 했다. 사전에 구조대원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다들 특전사나 해병대 등 군인 출신들이 많았는데, 실제로 그럴 만한 분들이 꽤 되더라. 그렇게 실제 배우에게 영향받는 부분은 분명 있다. 가령 대통령을 연기한 차인표가 처음에는 너무 세게 소리 지르고 표정도 강하게 하니까 좀 거북한 느낌이 있었는데, 막상 슈트를 차려입고 카메라가 돌아갈 때 딱 그러니까 전혀 어색하지 않고 좋더라. 저런 대통령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웃음) 그래서 그냥 원하는 대로 쭉 하라고 했다.
-반면 인해를 연기한 수애는 <감기> 촬영 종료 뒤 출연한 TV드라마 <야왕>에서 비슷한 악녀 이미지를 선보였다. 감독으로서 많이 아쉬울 것 같다. =그러게 그게 참. (웃음) 딸과 함께 달아날 때 다른 애들이 막 쫓아오니까 그걸 뿌리치는 장면도 있고, 하여간 자기 딸을 지키려고 온갖 이기심을 발휘한다. 그런데 나나 수애나 굉장히 즐겁게 연출하고 연기했다. 엄마가 의사로서의 본분을 잊고, 위기상황에서의 공적인 태도를 뿌리치며, 그저 자기 아이밖에 모른다. 그런데 결국 그런 이기심이 다른 아이와 사람들을 살리는 유일한 항체가 된다는 게 <감기>의 아이러니다. 더 근사한 이기적 장면들이 많은데(웃음) 편집단계에서 많이 덜어냈다. 아무래도 상업영화에서 악녀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게 부담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어쨌건 두 배우의 호흡이 좋았다. 둘 다 다음에는 로맨틱코미디로 만나자고 하더라.
-<감기>의 가장 뛰어난 점은 재난으로 인한 수용소의 풍경 묘사다. 수용과 격리, 그리고 탈출에 이르기까지 무척 사실적이다. =처음에는 학교나 체육관 같은 곳을 떠올렸는데, 전문가가 보더니 일단 주거지로부터 격리시켜야 하고 그런 공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했다. 그래서 길게 이어진 탄천을 따라 탄천수용캠프로 설정했다. 그리고 감염자들은 전혀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지하주차장으로 밀어넣어 자동차를 위해 그어져 있는 한칸씩을 그 경계로 만들었다. 생매장하는 종합운동장의 경우 자연스레 외부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평소에는 축제와 함성의 공간인데 재난이 닥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재난상황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시민들의 동요다. 그렇게 철저하게 공간을 격리하는 게 중요했다. 진짜 할리우드영화에서 본 것 같은 대규모 재난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28>을 쓴 정유정 작가처럼 구제역 파동 때 대규모 돼지 살처분 영상을 보고 받은 충격으로 <감기>를 시작했다고 알고 있다. =당시 구제역 파동 때 돼지 300만 마리를 죽였다. 왜 그렇게 많이 죽였냐 하면 충청도에서 발생했다가 또 며칠 있다 경상도에서 발생하는 식이니, 불호령이 떨어져서 겁이 나니까 의심 가는 돼지들을 그냥 싹 다 죽여버린거다. 그래서 영화를 준비하며 이름을 밝히기 곤란한 전문가 한분이 계신데, 그분에게 ‘과연 우리나라에서 동물이 아닌 인간에게 그런 일이 생겨도 그렇게 대처할까요?’ 하고 물었다. ‘당연히 그렇죠’라고 답하시더라. 그런 일이 발생하면 지역 고립과 폐쇄, 살처분과 매립이 분명 있을 거라고 했다. 게다가 국가의 방역 플랜도 미비하니까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하고,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이야기가 굉장한 확장성을 갖게 되더라. 궁극적으로는 국경 없는 공포라고나 할까.
-실제 영화 속 인간 살처분 광경은 충격적이다. =맞다. 가장 공들여 설계한 부분이다. 그때 죽어가는 돼지들이 꽤에에엑 내뱉는 소리가 마치 ‘너희 인간들은 안 당하나 봐라’ 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인간들은 ‘우리의 안전을 위해 감염됐건 안됐건 하여간 최대한 많이 죽어줘야겠어’라며 무차별적으로 생매장했다. 지옥과 같은 풍경으로 묘사하고 싶었다. 사체들을 감싸 버리는 비닐 보디백을 최대한 많이 구해달라고 주문했다. CG로 나머지 부분을 처리하기도 했지만, 특수분장회사 ‘셀’에서 거의 2천개 가까이 만들었다. 힘들게 구하다보니 비닐 색깔이 이것저것 막 섞여 있는데 그게 더 공포스러웠다.
-지금보다 더 끔찍하게 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왜 아니겠나. 익스트림 롱숏으로 중장비가 시체들을 파묻는 종합운동장 장면에서, 인간생매장의 풍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리고 싶었다. 가장 먼저 프리비주얼 작업을 한 공간도 종합운동장이다. 관객이 그 장면 하나로 영화 전체를 다 볼 수 있길 바랐다. 분량도 꽤 길었는데 워낙 끔찍해서 많이 덜어냈다. 장혁이 사체 더미를 헤맬 때 비닐이 뜯어지면서 훼손된 사체 조각과 침출수가 흘러내리는 장면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15세 관람가를 받을 수 없었겠지. (웃음)
-등급도 그렇지만 개봉 직전 배급사가 바뀌는 일을 겪었다. 혹시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있나. =감독은 영화의 얼굴마담이지 결코 주인이 아니다. 개봉일 결정이나 배급사 문제 등 윗분들이 기본적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협의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현명한 결정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판단할 문제다.
-군중 신이나 액션 장면 연출의 파워가 상당했다. 그런 데서 ‘김성수의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사에서 장혁과 마동석이 싸우는 장면이 있는데, 시간상으로는 길지 않지만 굉장히 신경 써서 찍었다. (웃음) 앞서 준비하던 액션영화가 엎어져서 갈증이 많던 차에 시작한 영화였으니까. 실제로 <감기>는 액션적인 요소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에 시작한 프로젝트이기도 한데, 막상 그러기가 쉽지 않더라. 감독으로서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을 만들면 안되는 것이니 <감기>라는 영화의 재난에 집중했다. 촬영 들어가기 전 장혁에게 ‘너 이번 영화에 마동석과 야수처럼 싸우는 장면이 하나 있어’라고 말하니까 무지 좋아하더라. 걔도 액션을 좋아하니까. 그런데 ‘네가 회심의 라이트훅을 날려. 그런데 그게 빗나가’라고 말해주니 너무 괴로워했다. (웃음) 아무튼 그런 장면 연출할 때는 확실히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더라. 다음 영화는 꼭 액션영화로 하고 싶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