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그리고 싶은 것>에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이었던 심달연 할머니. 그리고 심달연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그림책 <꽃할머니>를 그려가는 권윤덕 작가. ‘한.중.일 평화 그림책 프로젝트’에 참여한 권윤덕 작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통해 ‘평화’를 얘기하려 하지만, 일본에선 자신들의 민감한 역사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이 작품이 영 불편하다. 결국 <꽃할머니>는 2010년에 한국에서 먼저 출간된다. 자신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그림책이 세상에 나온 것을 확인한 심달연 할머니는 책이 출간된 몇달 뒤 눈을 감는다. 자신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는 끝내 보지 못하고. 심달연 할머니에게 아름다운 선물을 안겨준 권윤덕 작가는 그 과정에서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의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싶은 것>에서 <꽃할머니>의 그림책 구연을 맡은 배우 김여진이 권윤덕(오른쪽) 작가와 만나 그 시간을 함께 얘기했다. ‘꽃할머니’가 함께 계셨더라면, 하는 생각은 이날 인터뷰 자리에 있었던 모든 이들이 공유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씨네21_오늘 두분이 처음 뵙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권윤덕_그림책 구연해줄 때 전 이미 촬영이 끝난 상태였어요. 김여진씨가 아기 낳고 얼마 안됐을 때 구연을 해줬는데, 그 말 듣고 어찌나 고맙던지.
김여진_녹음했던 게 아마 지난해 이맘때였을 거예요. 출산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잖아요. 그때 처음으로 잠깐 아기 맡기고 나와서 일했던 거예요. 그동안은 오로지 엄마로만 살았었고. <그리고 싶은 것> 내레이션하려고 영화 볼 때도, 집에서 옆에 아기 눕혀놓고 이어폰 끼고 그렇게 봤어요.
권윤덕_강연 다니면서 낭독회를 많이 하는데 제가 그림책 읽을 때랑 여진씨가 낭독할 때랑 소리가 굉장히 다르더라고요. 여진씨의 내레이션에는 사람을 콕콕 찌르는 무언가가 있어요.
김여진_그림책 구연할 기회라는 게 사실 어릴 때와 엄마가 됐을 때, 그때뿐이거든요. 근데 동화구연을 모든 어린이가 하는 건 아니잖아요. 반에서 한두명 하는데, 그 한명이 저였어요. (웃음) 낭독은 평소에도 좋아해요. 책을 소리내 읽는 느낌이 좋아서 낭독은 기회가 닿으면 흔쾌히 수락하는 편이에요.
씨네21_영화에선 최대한 감정을 절제한 채로 내레이션을 했습니다.
김여진_여태껏 해본 내레이션 중에 가장 힘들었어요. 감독님이 워낙 욕심이 많으셔서. ‘거기와 거기 사이 어딘가쯤의 감정으로’ 이렇게 디테일하게 요구하시니까, 오랜만에 진땀 흘렸어요. (웃음) 녹음은 여러 버전으로 했는데 최종적으로 감독님이 오케이한 건 담담하게 한 버전이었어요. 그 선택이 맞다고 생각해요. 감정을 싣고 읽었다면 듣는 사람이 힘들었을 거예요. 너무 아픈 얘기라.
씨네21_권효 감독과는 어떻게 연이 닿아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되셨나요.
권윤덕_이거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사실 권효 감독의 고모가 제 친구예요.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시리동동 거미동동>이라는 그림책을 만들고 제주 기적의 도서관 개관식 때 책 전시를 했는데, 그때 방송작가인 권효 감독의 고모를 만났어요. 한.중.일 평화 그림책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일본과 마찰이 생겨 힘들 때 그 친구한테 하소연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이거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한 거죠. 그러면서 조카인 권효 감독을 소개시켜줬고. 지금 생각하면 다큐 찍겠다고 우리 집 대문 열고 권효 감독이 들어섰을 때 그 문을 열지 말았어야 했어요. (웃음)
씨네21_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얘기는 언젠가 꼭 한번은 다뤄야 할 주제였다고 영화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권윤덕_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어요. 영화를 보면 아시겠지만 그게 저한테는 계속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문제에 무심할 수가 없는 거죠. (권윤덕_작가는 어린 시절 성폭력 당한 경험이 있다는 것을 카메라를 앞에 두고 힘겹게 고백한다.)
김여진_전 여러 문제들 중에서 위안부 문제를 더 아프게 받아들인 게 얼마 안됐어요. 2011년에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했던 게 결정적이었어요. 임신한 상태로 배부른 채 무대에 올라 공연했는데, 그 경험이 특별했어요. 그즈음 1천회 수요집회에도 나갔고, 할머니들 쉼터에도 갔어요. 전에는 어떤 문제를 바라볼 때 역사, 계급, 여성, 이렇게 거시적으로 접근했는데, 위안부 문제만큼은 개인의 고통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정말 복잡한 문제예요. 일본만이 가해자가 아니잖아요. 할머니들이 받아야 할 보상을 나라가 다 받았어요. 그 과정에서 할머니들은 완전히 소외됐고. 그분들에게 평생 덧씌워진 굴레와 온갖 멸시, 그건 우리 문제거든요.
권윤덕_분노의 대상이 일본이라는 국가가 돼선 안돼요. 큰 구도 안에서 전쟁도 보고, 인권도 봐야 해요. 우리나라도 베트남전에 참전해서 못할 짓 많이 했지만 그건 아무도 얘기하지 않잖아요. 점점 양국이 들끓듯 대립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워요.
김여진_일본의 우익은, 전시에 목숨 걸고 싸우는 군인들에게 여성이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당연하지 않냐고 말해요. 그런데 그 시각이 우리나라 남성들의 시각이기도 해요. ‘전쟁이 나면 여자들이 당하는 거 어쩔 수 없지. 남자들은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여자들이 총 들고 나가는 거 아니지 않냐’는 생각. 그게 우리 안에도 있어요. 요즘은 그런 발언이 노골적으로 나와서 더 섬뜩하고.
씨네21_심달연 할머니를 그림책의 모델로 삼게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권윤덕_어른들을 위한 작품을 만들었다면 아마 심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할머니들의 증언집을 읽다보면 구구절절한 얘기들이 정말 많아요. 그 안에는 여성이 아니면 느끼지 못할 감정도 있고…. 그런 부분을 더 표현해보고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러면 위안부 문제의 일부만 다루게 되니까. 위안부 문제를 다룬 책을 내기로 했을 때 이 문제를 역사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심 할머니 얘기에는 일단 스토리가 있어요. 13살이라는 당시 할머니의 나이도 성과 역사에 눈뜨기 시작하는 아이들과 맞아떨어질 것 같았고…. 심 할머니의 증언도 굉장히 생생했어요. 내가 그 시대를 겪지 않았지만 그림으로 그릴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거죠. 심 할머니는 실제로도 말을 얼마나 재밌게 하시는지 몰라요. 위안부 할머니들 만나러 간다고 하면 마음이 무거워지잖아요. 가서 어떤 위로를 해드려야 하나 싶고. 그런데 심 할머니는 당신이 먼저 즐겁게 얘기하세요.
김여진_제가 만난 할머니들도 성격이 다 달라요. 그것도 놀라워요. 비슷하게 끔찍한 경험을 하고 비슷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면 사람들도 다 비슷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안 그래요.
권윤덕_그게 바로 삶이 아닌가 싶어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현실에서 꿋꿋이 살아남으신 거잖아요. 살아남으면서 스스로 만들어간 삶의 모습이 다 다른 거지. 그래서 한분 한분 아름다우신 거고.
위안소 풍경. 위안소의 구조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들이 한눈에 설명되도록 부감 숏으로 그렸다.
씨네21_심달연 할머니에게 과거 얘기를 물어보는 과정도 쉽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권윤덕_‘이 내용은 꼭 알아가야 하는데’ 그런 게 머릿속에 분명 있죠. 제가 정말 궁금했던 건 위안소 안의 모습이었어요. 나눔의 집 할머니들을 만나서 인터뷰할 때도 어렵게 어렵게 구체적인 과거 얘기를 여쭤보면 할머니들이 그때부터 입을 딱 닫으세요. ‘그걸 어떻게 말로…’ 이러시면서. 일본으로 끌려가기 전에 얼마나 힘들게 사셨는지는 한 시간도 넘게 길게 얘기해주세요. 그런데 위안소 얘기를 물어보면 말씀을 안 하세요. 결국 심 할머니한테도 그 부분은 여쭤보지 못했어요. 대신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드리고 글을 읽어드려요. ‘할머니, 어때요? 할머니, 그림 예쁘게 그려졌어요?’ 하고 물으면 ‘그림을 어떻게 그렇게 잘 그려’ 그러세요. (웃음) 할머니 표정 보고 반응 보고 가늠해서 고쳐 그리는 작업을 반복했어요. 스스로 감정이 정제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할머니께 그림을 보여주기 시작했는데, 할머니가 좋아하는 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들기 시작했어요. 할머니가 제 그림책을 좋아하신 게 지금도 제일 기쁘고요.
김여진_이 영화가 일본에서도 꼭 상영됐으면 좋겠어요.
씨네21_일본에서 영화가 개봉하면 <꽃할머니> 출간에도 힘이 실리지 않을까요.
권윤덕_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림책을 한.중.일 3국이 동시에 출간하는 게 프로젝트의 취지였는데, 일본쪽에서 계속 수정 요구를 해와 미뤄진 거니까. 그런데 (한국 출판사) 사계절에서 심 할머니가 아프시니 일단 우리가 먼저 책을 출간하자고 해서 서둘러 책 내길 잘한 것 같아요. 한국에서 책에 대한 반응이 좋으니까 일본에서 더이상 세세하게 수정 요구를 못하게 됐거든요. 질질 끌었다면 중간에 흐지부지되고 말았을 거예요. 일본의 특성인지 모르겠는데, 일본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문제를 얘기하지 않아요. 빙 둘러서 얘기해요. 그러면 은근슬쩍 문제의 책임이 내게로 돌아와요. 책이 출간되지 못하는 이유가 작품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돼버리는 거죠. 그래서 한번은 더이상 못하겠다고, 포기하겠다고 말하려 했는데, 선배 작 가가 그러시더라고요. ‘너는 절대로 못하겠다는 말을 하면 안된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일본에 지는 거다.’
씨네21_한지에 먹물로 스케치한 다음 색을 입히는 작업 방식도 신선합니다.
김여진_전혀 다른 차원의 예술이던데요. 그림책 보고 있으면 그 섬세한 작업들이 다 느껴져요. 그런데 어깨 아프지 않으세요? (웃음)
권윤덕_아프죠. 남편이 가끔 어깨를 주물러주면서 ‘당신은 생각주머니가 어깨에 달렸나봐’ 그래요.
씨네21_특히 어깨가 많이 아프셨을 것 같은 그림이 위안소 풍경을 묘사한 장면이 아닐까 싶어요. 위안소의 구조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들이 한눈에 설명되도록 부감 숏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언뜻 조선시대 행렬도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권윤덕_행렬도 같은 조선시대 기록화들을 좋아해요. 그림 한장으로 한 공간의 시간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작업들을 종종 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 그림은 초기 스케치 단계부터 제일 중요한 이미지였어요. 일본에선 가장 불편해하는 그림이죠.
김여진_우리가 봐도 힘들어요. 그러니 한편으론 일본 출판사쪽 입장도 이해는 돼요. 그들은 몇 배로 더 충격적일 거 아니에요. 또 책을 내는 사람에겐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는 게 우선일 테니까 그림의 수위를 조절하려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혹시 타협하실 생각은? (웃음)
권윤덕_수도 없이 했죠. 처음엔 그림이 더 직접적이었잖아요. 벚꽃 대신 천황을 상징하는 국화를 그려넣고, 천황의 얼굴도 그려넣고. 일본에서는 기겁했죠. 그런데 오히려 일본에서 문제가 됐던 장면은 심 할머니와 언니를 일본군이 강제연행하는 장면이었어요. 군인이 직접 끌고가면 국가가 전면에 나섰다는 뜻이 되니까 그 장면을 고쳐달라 하더라고요. 동심사에서, 위안부 문제에 일본 국가가 개입했다는 것을 밝힌 책(<종군위안부>)을 쓴 요시미 요시야키 선생님에게 그림책 자문을 받았는데 그 장면을 지적했대요. 보수단체에서 이 장면을 문제 삼았을 때 반박할 수 있는 근거자료가 있어야 하는데 심 할머니 증언에는 ‘군인’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거든요. ‘커다란 사람 두명이 와서 끌고갔다’는 표현만 있어요. 그래서 요시미 선생님이 ‘국가는 뒤에 배치하고 끌고 가는 사람을 민간인으로 표현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는데, 그걸 어떻게 그려요. (웃음) 결국 일본판에서 타협한 게 한명은 빵모자를 쓴 앞잡이처럼 그리고, 한명은 황토색의 제국주의 시대 옷을 입은 사람으로 그리는 거였어요. 일본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분의 얘기니까 그 의견을 수용한거죠.
씨네21_한국판과 일본판, 초판과 최종 버전을 다 모아놓고 비교해봐도 재밌겠어요.
권윤덕_중국에서도 아직 책이 출간 안됐는데, 중국은 뭐가 문제냐면 동아시아 지도 그림에서 국경선이 제대로 표시 안됐다는 거예요. 중국은 국경선에 정말 민감해요. 중국에서 만든 지도를 사용하지 않으면 이 그림은 쓸 수가 없다고 해요. 한.중.일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죠? 겪고 보니 출판은 한국이 제일 자유로운 나라더라고요. (웃음)
씨네21_그래도 이번 작업을 통해서 개인적으로는 마음의 치유가 되셨을 것 같습니다.
권윤덕_엄청 단단해졌어요. 그리고 권효 감독한테 고마운 게 나 대신 기록해줬다는 거. 전엔 상처를 잊지 않으려고 계속 되새김질했어요. 그 시기 내가 어떤 감정이었는지 끊임없이 기억하려 했어요. 그래서 늘 한쪽이 멍들어 있었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권 감독이 기록해뒀으니 이젠 내가 아프게 기억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면서 많이 편해졌어요.
김여진_전 이 영화에 참여했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워요. 밥숟가락 얹듯 제 목소리를 얹은 것밖에 없어서. (웃음)
씨네21_<그리고 싶은 것> 소셜펀딩의 첫 번째 공감후원인이기도 하시잖아요.
김여진_실은 후원 요청이 왔어요. 세상과 단절된 채로 산 지 너무 오래돼서 소셜펀딩이란 것도 잘 몰랐는데, 아주 작은 노력으로도 할 수 있는 의미있는 일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다행이었죠. 소셜테이너라는 말, 요즘은 사람들이 잘 안 쓰잖아요. 나 역시도 그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데, 지금까지 우연과 우연, 인연과 인연이 계속 이어져서 참여했던 것뿐이에요. 홍대 해고 청소노동자들의 집회에 간 것도 어느 날 기사 보고 울컥해서였고, 김진숙 위원과도 트위터상에서 서로 ‘맞팔’하다가 정이 들어서 농성장에 놀러갔던 거고.
일본에서 문제가 됐던 장면. 심달연 할머니와 언니를 강제연행하는 모습.
씨네21_그런 게 정말 건강한 사회참여이고, 운동인 것 같습니다.
김여진_구호 외치는 거 잘 못해요. 집회문화에 익숙하지도 않아요. 지금도 관심가는 문제에 한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요.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는 게 나름의 원칙이랄까. <그리고 싶은 것>도 한두 시간 내레이션하면 된다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거고. 요즘도 집회나 현장에 와달라는 요청이 가끔 들어오는데 낮에 애 봐줄 사람 없어서 못 간다고 할 때가 많아요. (웃음)
권윤덕_<꽃할머니> 나온 뒤로 저한테도 제주 4.3항쟁을 그려달라,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려달라, 부탁들을 하세요.
김여진_그런 데 너무 마음 두지 마세요. 하고 싶으신 것만 하세요.
권윤덕_그래도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얘기들이 있으니까, 힘들어도 그런 작업을 내가 해야 될 것 같아요. 재밌는 책은 다른 사람들이 하고, 힘든 건 내가 하고. (웃음) 그런 작업은 노력한 만큼 성과가 보이지 않아서 사람들이 쉽게 시도를 못하는데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김여진_정말 대단하세요. 그런데 배우는 선택되는 거니까, 사회성있는 작품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어요. 개인적으로 영화나 드라마는 일종의 오락이라고 생각해서 작품 하나하나에 의미를 둘 순 없는 것 같아요. 대신 그걸 하는 동안 즐거워야겠죠. 올해 안에 드라마를 할 것 같은데, 그 작품도 순전히 오락적인 작품이에요.
씨네21_선택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직접 연출하는 것으로 해소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김여진_연기자로 남고 싶어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글을 쓸 수도 있고 인터뷰를 할 수도 있으니까. 연출자나 작가의 재능은 좀 다른 것 같아요.
권윤덕_연기를 잘하는 것 역시 대단한 재능이죠.
김여진_감사합니다. 그런데 작가님도 저처럼 실물이 훨씬 고우신 것 같아요. (웃음)
심달연 할머니를 꽃할머니라고 부르는 까닭
“그때 내가 열두살 먹었던가, 열세살 먹었던가, 그 정도 됐지 싶다. 우리도 농사를 쪼금 지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나와서 설치고 다니면서 다 뺏어가예. 그래가 묵을 게 하나도 없다카이. 묵을 게 없고 배는 고프고 하니 엄마가 가가 나무뿌리라도 캐오라카데. 어지러버 못 다니겠다 카미 뭐라도 뜯어 오라카데. 그래가 언니하고 둘이서 나물 캐러 나갔다카이.
그래가 그걸 뜯고 있는데 차가 오디만은, 모자 쓰고 커다꿈한 사람들이 두어명 내리데. 내려서 쫓아오디마는 우리 광주리를 틱틱 차뿌리는 기라. 그라디만 차를 타라꼬 그라는 기라. 그래 둘이 고만 끌안았어예. 그때 들에 딴 사람은 없었어예. 그라더니만 나를 발로 차버리고 우리 언니를 머리꺼디를 이래 쥐고는 차에 끄잡아 얹데. ‘언니야’ 하고 내가 막 울면서 그카니까 쫓아오디만 내조차도 주워올리버리데. 이래가지고 둘이서 한꺼번에 잡혀갔어예.”-<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3> 심달연 할머니 증언 중 일부
1927년 경상북도 칠곡에서 태어난 심달연(사진 오른쪽) 할머니는 13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대만, 만주, 사할린 등지로 끌려다니며 극심한 신체적/정신적 폭력에 노출됐던 할머니는 이후 몇 십년 동안 과거의 기억을 상실한 채 살았다. 귀국 뒤 절에서 생활하다 절을 찾은 여동생의 눈에 띄어 병구완을 받게 되지만 기억을 되찾기 전에 여동생이 먼저 사망한다. 이후 대구의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손자와 함께 살던 할머니는 꽃누르미를 하며 원예치료를 꾸준히 받았고, 실력을 인정받아 원예작품 개인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꽃할머니’라는 애칭도 그렇게 붙여졌다. 제61차 유엔인권위원회의 본회의회와 국제 NGO포럼 등에서 증언을 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목소리를 내왔던 할머니는 2010년 12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