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급습`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 1월 하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하 <성소>)의 편집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김현 편집실을 아무런 예고도, 통보도 없이 불쑥 찾았던 사정은 이렇다. 한국영화 사상 최대 프로젝트인 <성소>의 후반작업 풍경과 장선우 감독이 짓고 있을 표정이 못 견디게 궁금했던 기자는 지난해 말, 장 감독에게 “부디 편집실을 찾아가게 해달라”는 취지의 간절한 이메일을 띄웠다. 거기엔 이미 몇 차례 <성소> 촬영장에서 장 감독과 마주쳤던 터라 흔쾌히 승낙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함께 담았다.며칠 뒤 장 감독은 “… 편집실을 들키고 싶진 않네요…. 모 해둔 거도 없고…. 그렇게 대단하구 무지막지한 영화는 아닌데다가…. (편집도) 아직은 오리무중이에요. 암튼요 깊은 관심 고맙구요…. 나중에 봅시다…”라며 편집실 공개가 곤란하다는 뜻을 밝혔다. 못내 아쉬웠지만 그의 의사를 존중해 편집실 방문을 포기하려던 어느날, ‘장 감독이 편집실을 찾은 여러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며 자신감을 표하고 있다’는 미확인 정보가 레이더망에 잡혔다. `편집실 습격사건`을 실행하기로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은, 어쩌면 그 이야기 때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 미확인 정보는 단지 핑계였을 뿐, `설사 내쫓기야 하겠냐`는 호기와 `참을 수 없는 <성소>에 대한 호기심`이 적당히 뒤범벅된 결과였을 법도 하다. 결국 무턱대고 편집실에 발을 들여놓은 뒤, 장 감독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수밖에 별 도리는 없었다.장 감독, 와인 한병에 무장해제 “… 뭐야, 이래도 되는 거야, 이렇게 그냥 막 쳐들어오는 건가?” 막 편집실 방 문턱을 넘어선 불청객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장선우 감독이 한마디 던졌다. 경우에 따라선 살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을 던지는 그의 표정이 그리 적대적이진 않다. 일단 성공이다. 와인 한병을 사왔다는 이야기에 “와인? 하, 그건 좋지”라며 노기를 조금 더 누그러뜨린 그가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영화를 왜 자꾸 보려고 해?”라는 말을 하며 슬쩍 미소를 비쳤다. 속으로 진입완료, 작전성공, 을 외친다. 결국 그는 “오늘 편집 끝날 때까지 구경할 거야?”라며 이날 편집이 끝날 때까지 있어도 좋다는 뜻을 돌려 말했다.3개월째 <성소>의 편집이 이뤄지고 있는 김현 편집실은 서울 혜화동의 한 아파트에 자리하고 있어 아늑한 분위기였다. 평소에는 제작팀으로 버글버글거린다지만, 이날 따라 스크립터와 연출부 몇명만이 편집실을 지키고 있어 더욱 평안한 느낌이었다. 수많은 스탭, 배우에다 각종 지원을 해주는 군·경찰 병력까지 뒤얽혀 어지럽기까지 하던 촬영장 분위기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소파에 기대앉아 아비드 편집기로 이뤄지는 편집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장선우 감독의 인상에서도 촬영장에서 잠시나마 느껴졌던 초조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해 10월31일 9개월 동안 부산에서 진행된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이후, “일주일에 닷새는 편집, 하루는 <바리공주> 사무실에 가고, 일요일엔 쉬면서” 편집에 매달려온 그는 서서히 겉모습을 드러내는 영화를 보며 활기를 찾는 모양이었다.편집실을 찾을 당시, 이 영화의 편집작업은 절반을 훨씬 넘긴 상태였다. 32만자 정도 되는 촬영분에서 필요한 컷을 뽑아 일단 순서를 맞추는 순서편집은 며칠 전 완료됐고, 컴퓨터그래픽과 사운드, 일부 미촬영분을 뺀 상태의 A편집본을 완성해나가는 단계였다. 장 감독의 예정대로라면 2월 중순까지 A편집본을 완성한 뒤 미촬영분을 찍고, 3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컴퓨터그래픽(CG)과 사운드 작업에 임하게 된다.여유있는 듯 보여도 7월 개봉에 맞추려면 일정은 빡빡한 편이다. 블록버스터영화답게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운드와 음악을 집어넣어야 하고, 상당부분 장면이 CG의 손길을 거쳐야 하기 때문. 특히 이 영화의 배경은 대부분이 사이버 공간이며, 이에 대한 표현 역시 “현실과 게임의 중간 정도”로 맞출 계획이기 때문에 CG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만약 편집이 끝났다고 이후 작업에서 방심했다간, 100억원이 넘는 돈과 수많은 스탭의 숱한 세월을 녹여낸 이 초대형 프로젝트가 `저연령 아동물`로 전락할 것은 자명한 일. 장 감독이 CG작업에도 참여해 이것저것 챙겨보려는 이유도 이같은 사정 때문이다. “나야말로 이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 가장 궁금해하는 사람”이라는 장 감독의 말이 엄살이 아님은 분명하다.2시간이 넘으면 안 되는데…, 어떻게 잘라내지이날 편집한 부분은 영화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는 대략 초반 30분부터 1시간 지점까지. `성소`라는 게임에 접속한 중국집 배달부 주(김현성)가 성소(임은경)를 찾아가는 길에서 라라(진싱)를 만나는 장면들과 악당 패거리인 오인조와 비련파 등이 성소를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이는 신들이다. 총 3단계로 나뉘어 있는 이 영화의 1단계에 해당되는 지점이라 대형 액션신이나 긴박한 상황 전개는 많지 않았지만, 처음 만나는 <성소>의 화면은 기대감을 부풀게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대사와 지문이 상세하게 적혀 있는 일반적인 시나리오와 달리, <성소>의 시나리오는 “소녀!… 분위기 잡는 순간 창고 벽을 뚫고… 또는 날아서 차가 들어옵니다. 비련파들이죠. 일제히 뛰어내려 주먹과 발로 번개같이 오인조를 제치고… 성소를 탈취해갑니다…”식으로 일종의 설정만을 부여하는 탓에 어떤 장면이 담겨 있을지 궁금하던 터라, CG 등으로 ‘화장’하지 않은 영상도 흥미롭게 보였다.
80%가 액션장면으로 이뤄져 있다는 장 감독의 말마따나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대목은 화려한 액션. 특히 `올바르게 살기운동본부` 간부에게 끌려가는 성소를 구하는 라라의 공중액션은 홍콩에서 데려온 무술감독의 액션 연출 솜씨가 두드러져 보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공중으로 붕 날아 기관총을 쏘고, 다시 공중회전을 해 오토바이에 착지하는 이 신은 며칠 동안 부산 서면 롯데백화점 앞길을 통제한 채 촬영했다는 그 장면. 홍콩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는 액션장면이었다. 오인조의 아지트를 비련파가 습격하는 장면의 액션도 그 못지않았다. 수직벽을 타고 달리는 라라의 모습이나 속도감이 느껴지는 자동차 추격신 등은 한국영화에선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장면들이었다. 2단계, 3단계로 갈수록 액션의 스케일과 속도, 난이도 모두 커지고 빨라지고 높아진다는 것이 장선우 감독의 설명이다.이어 눈에 띈 것은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수시로 화면에 나타나는 자막이었다. `라라-크로프트를 연상하면 됨. 하지만 여기선 레즈비언임. 공격력 뛰어나지만 정신력 산만함`식의 자막을 사용하는 것은 이 영화의 화면이 게임 인터페이스를 응용하기 때문이다. 캐릭터에 관한 설명뿐 아니라 게임 화면처럼 ‘공격력 얼마, 아이템 무엇’식의 팝업창도 개성있는 디자이너 최정화씨의 디자인과 CG작업을 통해 보여질 것이란다. 자칫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놓을 수 있는 자막과 팝업창을 지속적으로 삽입함으로써 이 영화는 현실과 가상공간과 판타지 중간의 어디쯤으로 관객을 인도할 듯하다. 비단선적 내러티브도 이같은 효과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롯데백화점 앞길 장면에서 영화는 라라가 멋지게 공중회전을 한 뒤 오토바이에 착지하는 장면을 보여준 뒤, `원래 의도는 이렇지만…`이라는 자막과 함께 비디오의 ‘되감기’ 버튼을 누른 듯 이전 상황으로 돌아간다. 이어지는 화면은 `실제로는…`이란 자막과 함께 공중회전을 한 라라가 땅바닥에 민망하게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이다. 또 액션 위주의 영화라지만 오인조들의 덜떨어진 행동이나 라라와 주의 대화 등을 통해 웃음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미뤄볼 때 완급조절에도 꽤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상식적인 얘기지만, 편집의 기능은 이야기를 짜맞춰나가는 것만은 아니다. 불필요한 장면을 빼내 이야기가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러닝타임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역할 또한 중요하다. <성소> 역시 순서편집된 분량이 2시간40분 남짓되는 탓에, 이날 편집의 핵심도 결국 장면들을 매끄럽게 잘라내는 일이었다. “2시간을 넘기면 안 되는데…. 아직 한국영화는 2시간이 넘어가면 뒷심이 달리는 것 같아. 이 영화도 뒷부분에서 힘이 떨어지면 끝장이거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 분량을 줄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장 감독이었지만, 막상 편집실 조수가 신을 과감히 들어낼라치면 “그 장면을 꼭 빼야 할까?”라며 은근히 제동을 걸었다. 감독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펴는 방법을 아는 듯한 김현 기사도, 한컷 한컷을 자식처럼 애지중지 여기는 감독의 뜻을 완전히 꺾진 못했다. 그는 “러닝타임이 2시간…10분, 아니 2시간3분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모르겠어”라며 말을 뒤집는 장 감독에게 슬쩍 눈을 흘기기만 할 뿐이었다. 이것도 팀워크일까. <꽃잎> 이전까지 줄곧 함께 작업했던 김현 기사에 대해 장 감독은 “그와 일하는 건 익숙해서 좋다”고 설명한다(김현 기사가 디지털 편집시스템인 아비드를 도입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때문에 장 감독은 <꽃잎> <나쁜 영화> <거짓말> 등 최근작 3편은 다른 편집 기사와 작업했다).“넉넉한 사람이면 영화에서 나비를 볼 것” 전체 영화 분량의 25%에 불과하고, 그나마 완성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잠시나마 접할 수 있었던 <성소>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특이하다는 것이었다. `장선우식 액션영화`, 그것도 구도(求道)라는 주제를 보일 듯 말 듯 품고 있는 영화답게 여태껏 한번도 보지 못한 독특한 스타일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편집과정을 조금이나마 보고나면, 이 영화의 정체가 어느 정도 밝혀지리라는 애초의 기대가 가당치 않았다는 점 또한 확실했다. 홍콩 액션팀이 연출하고 장 감독이 마무리하는 액션은 어떤 모양새를 갖추게 될 것인지, 게임이라는 가상공간을 주배경으로 삼은 것이 이 영화의 주요 모티브인 호접몽(胡蝶夢)과 어떻게 연관을 갖는 것인지,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악은 현대사회의 어떤 지점을 가리키는 것인지 등등, <성소>에 관한 궁금증은 오히려 더욱 커져만 간다. 그러고보면 “정신없이 보고, 극장 밖을 나설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나는 영화였으면 좋겠다”는 이 영화에 대한 장선우 감독의 바람도 <더록> 같은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처럼 화끈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선언만은 아닌 듯하다. “그릇이 넉넉한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서 나비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또다른 말처럼 극장 문을 나서는 관객의 뒤통수에 묵직한 한방을 날리겠다는, 관객의 마음속 깊은 곳을 `습격`하겠다는 뜻도 함께 담고 있는 건 아닐까.문석 ssoony@hani.co.kr사진설명1. 장선우 감독2. 80%가 액션장면으로 이뤄진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대목은 화려한 액션. 편집실에서 본 <성소>의 액션은 한마디로 특이했다. 수시로 나오는 자막과 게임 화면 같은 팝업창은 어떤효과를 가져올까?3. 거리에서 자신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마구잡이 총격을 가한 성소(임은경)는 발전소 꼭대기로 올라가 자신을 생포하려는 보위대와 대치한다. 그 과정에서 성소를 짝사랑하던 오비련이 살해되자 절망한 성소는 지상으로 뛰어내린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장선우 감독을 둘러싼 소문과 진상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편집실을 급습하다
2002-02-08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를 영화를 왜 자꾸 보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