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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마부인> 20주년 단편소설 (2)
2002-02-08

안소영 세대에 바친다

그날 나는 학원에서 보는 모의고사를 망치고 과음을 했다. 술에 취한 채로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 어디서 술을 깨고 갈까 고민하였다. 내 고민의 끝은 극장이었다. 술로 깔깔해진 입 안을 헹구기 위해 콜라라도 마시려고 매점 앞에 섰다. 매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극장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스크린에서는 당시 섹스어필의 대명사였던 남자 배우가 지적인 바람둥이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다. 극장 안을 살피다 말고 잠이라도 좀 자볼까 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같은 줄에 여자가 혼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하얀 블라우스가 스크린에서 비치는 빛을 따라 울긋불긋 변하였다.

매점 여자였다. 나는 그녀가 삼류극장 매점에 앉아 있긴 하지만 이런 영화는 전혀 안 볼 거라 생각해오던 터라, 그녀를 발견하곤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얼마전 극장에 왔을 때 불쾌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인지 곧 콧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이미 잠을 잘 생각은 달아나버렸다. 나는 여자를 흘낏흘낏 곁눈질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술김에 옆자리로 가서 수작이나 부려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왕에 그렇고 그런 여자라고 생각을 하자 못할 것도 없지 하는 호기가 생겼다.

그러나 나는 여자 옆자리로 가지 못했다. 여자에게 걸어가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여자가 앉은자리로 점점 다가가면서 나는 그녀가 기묘한 자세로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는 영화를 보고 있지 않았다. 긴 목을 앞으로 죽 빼고 손은 무릎에 얹은 채, 초록색 스커트 위로 굵은 눈물을 툭툭 떨어뜨리고 있었다. 여자의 어깨가 가녀리게 흔들렸다.

스크린에서는 섹시 스타가 안소영의 몸 위로 올라가 헉헉거리고 있었다.

그 다음날 극장에는 새로운 영화가 붙었다. 새로운 영화가 붙었는데도 한동안 새 간판이 오르지 않았다. 간판을 그리던 남자가 극장을 떠난 것이었다.

사내가 떠났지만 나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매점 여자는 매점 안 간이의자에 풀이 죽어 앉아 있는 일이 많아졌다. 입덧이 시작됐는지 입가에 물기를 자주 묻히고 있었다. 나는 덩달아 우울해졌다.

저기요….

콜라를 건네주며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여자가 말을 건 건 그게 처음이었다. 오래 생각을 하고 말을 한 건지 한마디를 하곤 입을 앙다물었다. 나는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말을 걸어주었다는 것에 감격했다.

저… 영화보고 시간 있어요?

예? 예….

그럼… 요 앞 분식점에서 좀 뵐 수 있을까요?

영화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자가 내게 만나자고 한다. 나를 말이다.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일찌감치 분식점에 나가 여자를 기다렸다. 여자는 늦게 나타났다. 급히 걸어 왔는지 숨을 좀 헐떡이고 있었다. 땀을 닦는 하얀 손수건 아래 감춰진 상기된 볼이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여자는 입덧 때문인지 음식을 잘 먹지 못했다. 나는 여자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어쩐지 걱정의 말도 하지 못했다.

부탁이 있거든요… 병원에 좀 같이 가주실래요? 보호자랑 같이 오래요.

예? 어디 아프세요?

나는 끝까지 모른 체하고 싶었다. 그녀의 임신 사실을 모르고 있는 남자이고 싶었다. 여자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는 여자의 눈을 피했다. 여자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수술을 해야 하는데… 같이 가줄 사람이 없어서요.

여자는 아이를 지우려고 했다. 보호자로 발탁된 것은 나였다. 이미 설명이 필요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에게 나도 더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수술을 하던 날 가는 비가 조금씩 흩뿌렸다. 여자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병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산도 받지 않아서 여자의 어깨는 젖어 있었다. 병원으로 들어서기 위해 문을 미는 그녀의 손이 약하게 떨렸다. 수술 동의서에 내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었다. 기분이 묘했다. 여자는 병원 대기실 소파에 조용히 앉아서 생각에 잠긴 듯 사시가 되어 있었다. 일을 보고 내가 옆자리로 돌아오자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고마워요. 이제 돌아가셔도 돼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술실로 걸어 들어가던 그녀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눈에 공포의 빛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이미 그녀와 병원에 들어올 때부터 그녀의 보호자다. 보호자가 돌아갈 수야 없다. 수술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산부인과 병원 로비 의자에 걸터앉아 주변 산모들의 눈치를 보며 두어 시간을 보냈다.

매점 여자는 회복실에 잠깐 누워 있다가 비틀거리면서 걸어 나왔다. 나는 뛰어가서 여자를 감싸안아 부축했다. 그토록 꿈꿔오던 포옹은 이렇게 어이없는 순간에 이루어지고 말았다. 여자는 몹시 힘이 든 듯 몸을 완전히 기대어왔다. 병원을 나올 때 빗줄기는 더 거세져 있었다. 병원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극장 앞으로 돌아왔다. 여자는 다시 매점에 돌아가야만 했다. 극장으로 들어가려는 여자의 손을 잡아끌고 나는 분식점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잘 먹지 못했다. 나는 그래도 좀 먹어보라면서 여자를 재촉했다.

어디… 살아요?

예? 예… 이 동네 살아요.

오늘 고마워요.

여자는 음식을 반이나 남기고 일어났다. 따라 일어나려는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혼자 가고 싶어요.

아… 예… 예.

나는 그 이후로도 극장을 드나들었다. 매점에서 콜라도 사먹었다. 그러나 여자는 나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나는 그녀에게 돈을 주고 그녀는 나에게 콜라를 건네주는 사이로 돌아가 있었다.

그해는 그렇게 갔다. 나는 대학에 합격했고 동네를 떠났다. 극장에는 그 이후로 한번도 가지 않았다.

배가 고프다. 극장 1층에 들어선 상가 중에 식당이 보였다. 식당 안은 텅 비어 있다. 구석자리에 앉아 설렁탕을 한 그릇 시켰다. 마음이 급하지는 않다. 어차피 어디 갈 데도 없다. 애초 생각이 극장을 찾아보자는 거였을 뿐 다른 계획도 없었다. 식당 문이 열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년의 여자가 한 사람 걸어 들어왔다. 앞머리로 가리긴 했지만 눈 주위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다. 식당주인이 주방에서 반가운 듯이 나왔다. 식당주인이 나오다 말고 한마디를 했다.

그 인간 또 왔어? 응? 여기 앉아봐. 아이고 몹쓸 놈. 서방이라는 것이….

여자는 식당주인이 가리키는 자리로 가 앉으면서 천천히 말을 했다.

설렁탕 한 그릇 우리 집으로 배달해주고요. 우리는 비빔밥 5개.

목소리! 나는 여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식당주인이 여자의 앞머리를 들어 올려 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멍이 든 홑겹의 눈. 무언가 생각할 땐 사시가 되던 그 눈! 바로 매점의 그 여자다. 세월을 비껴가지 못한 그녀의 얼굴에 가득 찬 피로. 언제나 단정히 입던 하얀 블라우스 대신 그녀는 낡은 티셔츠를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있다. 식당주인의 손을 스르르 빼더니 여자는 일어서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주인여자를 불렀다.

저기 저 방금 나간 아줌마 말입니다. 전에 극장에서 매점 보던 분 아닙니까?

주인여자가 나를 찬찬히 바라봤다.

지금도 매점 봐요.

극장 로비는 좁고 옹색했다. 매점은 간이 스탠드 형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매점 여자는 등을 돌린 채 간이의자에 앉아 비빔밥을 먹고 있었다.

콜라 하나 주십쇼.

여자는 내 말소리에 깜짝 놀란 듯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콜라를 내밀었다. 한손으론 입가에 묻은 고추장을 쓱쓱 닦아냈다.

700원이에요.

나는 만원 지폐를 냈다. 여자는 귀찮다는 듯이 금고를 열어 거스름돈을 꺼냈다. 그리고 돈을 건네주면서 흘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어떤 빛이 스쳐갔다. 멍이 든 여자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가도 싶었다. 한순간 여자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 듯하더니 다시 침착해졌다. 여자는 내게 돈을 주고는 간이의자로 돌아가 앉아 숟가락을 다시 집어들었다. 나는 물끄러미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콜라 캔을 집어들고 돌아서 나왔다. 코너를 돌다가 잠시 뒤돌아보았다. 여자가 일어나서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급하게 의자에 앉았다.

극장 안에 들어서자 어둠이 내 눈을 찌른다. 곰팡이 냄새가 공기 속을 떠돌고 있다.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서 멍하게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어제 여관방에서 본 것과 비슷한 비디오용 에로물이다. 과장된 여자의 신음소리가 극장 안에 가득하다. 주위를 두리번 둘러본다. 동네 건달인 듯한 청년이 두엇. 영화보기보다는 애인의 몸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한 커플도 두엇. 갈 데 없는 중늙은이들이 서넛. 한심한 삼류 비디오용 영화관의 관객다운 구성원이다.

극장은 작고 더 낡아졌다. 수줍고 단정하던 매점의 여자는 삶에 찌들어 옛모습을 잃어버렸다. 안소영은 가슴이 작고 왜소한 여자로 변했다. 나는 실직을 했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도 없다. 그냥 조금씩 낡아가고 옹색해지면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다. 왜소해진 안소영도, 우스꽝스러워진 극장 건물도, 매점의 여자도, 나도….

콜라는 병에서 캔으로 변했다. 목이 말랐던 나는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갑자기 사레가 들었는지 기침이 튀어 나왔다. 격렬하게 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기침이 멈춰지지가 않는다. 입 속의 콜라가 바지 위로 쏟아졌다.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는 울고 있었다. 김정미/ 시나리오 작가 ◀ 이전 페이지▶ 불능의 시대 밤의 여왕 <애마부인> 20년, 그 환각과 도피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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