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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엔진을 장착했다
주성철 2013-08-06

‘봉준호의 세계’와 <설국열차>의 도킹, 그 결과는…

봉준호의 영화는 결국 스릴러다. 그리고 언제나 예기치 못한 상황들을 맞닥뜨리며 무언가를 찾아다닌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의 아파트 관리사무소 경리 박현남(배두나)은 실종된 강아지를 애타게 찾고, <살인의 추억>(2003)의 시골 형사(송강호)와 도시 형사(김상경)는 연쇄살인범을 찾기 위해 힘을 합치고, <괴물>(2006)의 매점 아저씨 박강두(송강호)는 괴물이 끌고 간 하나뿐인 딸 현서(고아성)를 찾으려 한강변을 떠돌며, <마더>(2009)의 엄마(김혜자)도 아들(원빈)의 살인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스스로 범인을 찾기로 한다. 그럴 때 보통 정부와 경찰 등 공권력은 무능하다. <에이리언>(1979)처럼 <설국열차> 역시 절대권력자 윌포드(에드 해리스)가 이끄는 사기업의 세계다.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대는 빈민굴 같은 맨 뒤쪽 꼬리칸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선택된 사람들이 술과 마약까지 즐기며 호화로운 객실을 뒹굴고 있는 앞쪽 칸을 향해 나아간다. 그렇게 기차의 심장인 엔진을 장악하기 위해 긴 세월 준비해온 폭동을 일으킨다.

중요한 것은 그런 추적의 로드무비에서, 인물들이 드디어 목표했던 것을 찾았을 때는 해소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괴물> 정도를 제외하고(괴물에게 수갑을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그의 다른 영화들은 결말에 이르러 모두 정당한 법집행을 꿈꿨을 것이다. 그런데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처럼 배신감을 느낄 정도로 아예 해소해주지 않거나, <마더>처럼 영화 속 인물과 관객 모두를 속이면서까지 뒤틀리게 해소해주며 거대한 반전을 줬다. <설국열차> 역시 그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계속 이동하고 애타게 찾아다닌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같다. 어쩌면 다른 영화들과 달리 누구를 찾아야 하고,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쉽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설국열차>는 그의 다른 영화들과 달리 나침반이 필요없는 영화다. 하지만 <설국열차>의 핵심은 커티스가 열차의 꼬리칸부터 엔진실까지 다다르는 그 지난한 과정이 종료됐을 때, 전혀 다른 해소의 상황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방향이 정해진 로드무비이긴 하지만 그런 점에서 <설국열차> 역시 새로운 반전을 준비한 봉준호의 영화다. 어딘가 하나의 흐름처럼 느껴졌던 ‘봉준호의 세계’와 <설국열차>라는 새로운 열차 칸의 도킹이 그렇게 이뤄졌다고 느낀다.

봉준호의 영화는 늘 처음부터 수수께끼를 숨겨둔다. <살인의 추억>에서 경운기를 타고 가는 형사 박두만을 아이들이 쫓는다. 속주머니에서 뭔가 꺼내려던 그는 느닷없이 주먹감자를 날린다. 이 장면은 아무리 형사인 나를 쫓아와봐야 당신의 궁금증은 결국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얘기하는 것 같다. 심지어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서에서 강간 사건으로 조서를 쓰고 있는 두 남자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누가 강간범이고 누가 피해자의 오빠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범죄자의 얼굴을 한 사람은 딱 한명인데, 의외로 그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영화 속 박현규(박해일)가 범인일 것이라는, 아니 그가 범인이었으면 좋겠다는 암묵적 공감대를 결국 해소시키지 않고 마무리된다.

100% 세트영화, 비내리는 장면이 없는 영화

<괴물>에서도 괴물을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은 한강 다리에서 투신자살하려는 남자다. 그는 뛰어내리기 직전 무언가(기형적으로 성장해버린 괴물)를 발견한 것처럼 놀라는 표정을 짓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투신을 만류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잘들 살아”라고 말하고는 결국 뛰어내린다. 마치 ‘너희들은 이제 ×됐다’라는 저주처럼 들린다. 심지어 앞서 도입부에 등장하여 한강에 포름알데히드를 흘려보내는, 그리하여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는 연구원(김학선)은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2002)에서 김경수(김상경)에게 “우리 사람 되기는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고 했던 춘천에 사는 선배다. 보통 봉준호 감독을 향해 ‘봉테일’이라고 얘기할 때 그것은 결국 지엽적인 소품이나 미술적 재현보다는, 그런 구조적인 측면에서 파악해야 맞을 것이다. 과거 그는 봉테일이라는 별명에 대해 “어딘가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감독처럼 들려 굉장히 싫은 별명”이라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설국열차>에서 보자면, 송강호가 연기하는 인물 ‘남궁민수’라는 이름부터가 어딘가 길게 이어진 기차 같다. 세 글자 이름이 1.85:1 같다면 네 글자 이름은 왠지 2.35:1처럼 느껴진다(물론 <설국열차>는 예상과 달리 1.85:1 스크린 사이즈로 완성됐으며, 이에 대해 그는 인터뷰에서 ‘체질적으로’ 1.85:1에 더 맞는 것 같다고 얘기했다). 굳이 음절 하나를 하나의 열차 칸이라고 상상해본다면, 영어식 발음으로 ‘냄 궁민수’로 알고 있던 그가 영화에 등장한 다음에는 ‘남궁 민수’로 밝혀진다. 그런 음절의 조합에서 괜히 <설국열차>라는 일직선의 구조를 한번 더 생각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어쨌건 그는 이전에도 인물 내면의 풍경을 드러내는 긴 수평 트래킹 촬영의 묘미를 종종 드러내왔다. 말하자면 그가 이른바 수평 트래킹의 묘미를 가장 잘 살려낼 수 있는 ‘기차영화’에 다다른 것은 묘한 운명적 느낌이랄까(실제로 그가 <설국열차> 원작을 접하고 영화화를 꿈꿨던 시기는 <괴물>을 만들기 전인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백수나 다름없는 시간강사 고윤주(이성재)가 걸어가는 방향과 반대로 방역차가 하얀 소독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지나갈 때, <살인의 추억>에서 남장여자가 살해된 ‘향숙’으로 분해 논에서 현장검증을 시도할 때의 혼란을 고속촬영으로 훑고 지나갈 때, <괴물>에서 컨테이너에 잡혀 있던 강두가 바깥으로 나와 어처구니없이 바비큐 파티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며 도망갈 때 어김없이 수평 트래킹이 이어졌다. 혹은 <괴물> 마지막 장면에서 강두와 그의 양아들이 지내는 눈밭의 매점을 보여줄 때, 그것은 영락없이 <설국열차>에서 덩그러니 한칸만 남은 열차의 잔해처럼 느껴진다.

<설국열차>가 이전 봉준호의 영화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로케이션의 운용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봉준호의 영화가 가진 핵심적인 동력 중 하나는 바로 로케이션의 힘인데 <설국열차>는 100% 세트에서 촬영한 영화라 할 수 있다. 해외 배우와 스탭 등이 참여하는 글로벌 프로젝트라는 점보다, 어쩌면 그것이 <설국열차>에 탑승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그 스스로도 <설국열차>를 두고 “비 장면이 없는 내 첫 번째 영화”라고 말한다. 지난해 가을경 <씨네21> 873호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이 <설국열차>에 대한 기대를 “봉준호의 첫 번째 Sci-Fi영화임과 동시에 이전과 달리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통제된 상황에서 그의 재능과 창의성이 어떻게 발휘됐는지 확인하는 재미가 클 것 같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와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까지 작업하고 <설국열차>의 프리 프로덕션에도 깊이 참여한 류성희 미술감독의 경우 “<살인의 추억> 한편을 작업하는 동안 자동차로 전국 방방곡곡 60000km나 다녔다”고 말했을 정도다. 가령 <살인의 추억> 도입부에서 맨 처음 시체가 발견되는 하수구 또한 한 장소가 아니었다. 심지어 하수구를 덮는 돌 뚜껑까지 따로 제작해 이곳저곳을 다녔으며, 그 주변의 잡초 또한 미술팀이 일부러 심어놓은 것이었다. <마더>에서 도준이 노상방뇨를 하는 벽 또한 그저 시골 어딘가의 평범한 벽이 아니라 색깔부터 표면의 질감까지 미술팀이 세심하게 작업한 결과다. 그처럼 로케이션과 촬영현장의 ‘변수’는 언제나 그의 영화의 장점으로 작용해왔기에 달라진 환경이 궁금한 것이다.

또한 <설국열차>는 ‘한국’이라는 현실감이 탈색된 작품이라는 것도 중요하다. <플란다스의 개>의 아파트, <살인의 추억>의 실화, <괴물>의 한강, <마더>의 모성애처럼 집중하는 대목은 다르다 할지라도 그의 영화는 언제나 우리가 발딛고 선 바로 이곳의 현실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니까 미래의 지구 어느 곳을 상정한 프랑스 만화 원작을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설국열차>가 그의 가장 이질적인 영화가 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추론이었다. 열차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의 양상이 2011년 월스트리트 시위(Occupy Wall Street, 빈부격차 심화와 금융기관의 부도덕성에 반발하면서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일어나 미국 전역으로 확대됐다가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73일 만에 막을 내렸다)를 떠올리게 한다는 일부 비평, 환경 파괴로 인한 미래의 재앙이라는 막연한 양상 등 <설국열차>는 기본적으로 판타지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른바 봉준호의 색깔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애초에 무력하게 끝날 수밖에 없다.

언젠가 다다를 엔진실을 향하여

<설국열차>가 기존 봉준호의 영화들로부터 가장 많이 이탈한 영화라 할지라도, 예상된 이질감 이상의 낯선 기분이 드는 것도 납득하지 못할 건 아니다. 거기에는 지난해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2012)이 <괴물>의 한국영화 최고 흥행기록을 깨고, 2주 앞서 개봉한 김용화 감독(봉준호, 최동훈과 함께 비평적으로든 흥행적으로든 어떤 ‘큰 실패’의 기록을 가진 적 없는)의 <미스터 고>가 만족스런 흥행을 거두지 못한 데서 오는 기대치가 계속 더 누진돼왔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설국열차>처럼 관객과 언론이 혼연일체가 되어 최고조의 ‘기대’를 내내 한몸에 받은 영화가 지난 10년간 있었던가 싶을 정도다. 거기에는 봉준호의 영화가 다시 한번 우리를 들었다 놓을 것이라는 순수한 팬의 입장과, <설국열차>가 한국영화라는 산업적 지형도 안에서 꼭 좀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기이한 욕망이 섞여 있고, 그런 상반된 태도가 딱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희귀한 경우이다.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봉준호’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설국열차>는 이렇게 묘사된다. “잔인한 여행, 모두의 목적지는 한곳. 공간을 집어삼키며 가고 또 간다. 그 이름은 설국열차. 언제나 죽음을 마주한다. 권태를 모르는 설국열차.” 애초부터 봉준호는 바로 그 권태를 모르는 직진의 쾌감으로 순수한 액션스릴러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원작에서 드러나는 플래시백, 인물들의 교체, 챕터의 순환에 신경 쓰지 않고 <설국열차>는 그야말로 전자게임에서 매 미션에 최선을 다해 ‘클리어’하듯 나아간다. TV드라마나 영화에서 한번도 뺨을 맞아본 적 없다는 배우 김혜자를 뺨맞게 하면서까지 <마더>의 괴물 같은 엄마 김혜자를 만든 것처럼, 거의 밀랍인형과도 같은 틸다 스윈튼의 창백한 아름다움을 멋지게 변형해낸 솜씨도 놀랍다. 의외로 공간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보다 원시적으로 힘 대 힘으로 맞부딪히는 액션의 쾌감도 좋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 자신의 자리로부터 가장 멀리 달아나려 한 사람이 봉준호 그 자신일 것이다.

커티스가 이끄는 일행이 어린아이들의 교실에 다다랐을 때, 이제껏 그의 영화에서 전혀 보지 못한 색채의 향연이 펼쳐진다. ‘필모그래피’라는 이름의 설국열차 안에서 봉준호가 <플란다스의 개>라는 꼬리칸에서 출발했다면, 매번 새로운 문을 열어젖히며 나아가던 그가 바로 그 화려한 교실, 그러니까 설국열차 안에서도 가장 이색적으로 느껴지는 칸 정도에 도착한 게 아닐까. 그는 인터뷰에서도 “훗날 내 필모그래피를 쭉 보면 <설국열차> 이전까지를 나의 ‘초기작’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언젠가 다다르게 될 엔진실을 향해 여전히 묵묵히 전진하고 있다.

멜로드라마 OUT 권력구조 IN

원작 만화 <설국열차>와의 비교

원작 <설국열차>가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닌 3개의 챕터 ‘탈주자’, ‘선발대’, ‘횡단’으로 이뤄져 있다면, 영화 <설국열차>는 인물의 크나큰 교체 없이 오직 한 방향을 직진으로만 나아간다. 원작처럼 플래시백도 없으며 결정적으로 기차 바깥으로 나가는 장면도 없다. 원작에서는 ‘정지훈련’이라는 이름으로 기차가 정차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러니까 영화의 모든 사건은 기차 안에서만 이뤄진다. 원작에서는 주인공 프롤로프가 적들에게 쫓기던 중 유리를 총격으로 다 깨버리자, 그로 인해 여자친구 아들린이 얼어 죽는다는 설정도 있다. 그러고 보면 원작의 멜로드라마적 요소들도 사라졌다. 그저 일치하는 점이라면 꼬리칸과 엔진실이 양 끝에 있다는 것과 설국열차가 실제로 얼음을 부수며 달린다는 것이다. 제복을 입은 살인자들의 모습도 비슷하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라면, 권력구조라는 측면에서 원작은 열차 내에 평의회가 있다는 설정이지만 영화에서는 오로지 윌포드라는 절대권력자의 존재가 중요하다. 전개구조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1979)의 원작이기도 한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을 닮았다는 이야기가 거기서 유래한다. 윌포드는 어떤 이유로 특정한 아이들만을 거의 빼앗아가듯 데려간다. 원작에서는 그저 추위에 견딜 수 있도록 훈련시키기 위해 10∼14살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떼놓는다. 그 훈련을 모든 아이들이 소화하는 것이 아니기에 비극이 발생한다. 그렇게 영화 <설국열차>는 사기업을 이끄는 한 개인의 욕망과 본성에 집중한다. <에이리언>의 노스트로모호나 <토탈 리콜>(1990)의 화성이라는 공간과 비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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