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라는 건 늘 상대적이다. 열아홉 때는 서른이란 숫자가 고루해 보였는데, TV 좀 보고 마감 몇번 넘기고 나니 서른이더라. 사회에서야 서른이면 한참 어린 나이지만, 또래 집단 안에서 열살 차이는 사람 하나 뒷방 늙은이 만들기 충분한 법. 아직 대학을 졸업 못한 탓에 열살가량 어린 후배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있노라면 종종 필요 이상으로 세대 차이를 느끼곤 한다. <올드보이>가 개봉할 때 아홉살이었던 이들에게 <공동경비구역 JSA> 이야기를 꺼내는 서른의 선배란 얼마나 낡아 보일까. 대화의 맥이 끊기는 순간을 몇 차례 겪고 나면 자연스레 사람이 움츠러든다.
평생 막내로 살다가 갑자기 무리 중 최연장자가 된 부작용 때문일까. 좀 멀리 나간 것 같지만, tvN <꽃보다 할배>를 보다 불현듯 내가 마흔셋의 짐꾼 이서진이 아니라 평균연령 74살의 ‘H4’(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에 더 많이 감정이입을 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서로를 ‘깍쟁이’, ‘구야형’, ‘박가수’, ‘섭섭이’라고 부르며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어릴 적 소풍 가기 전날 밤 같다”며 흥분된 마음에 가방만 뒤적거리는 백일섭 선생을 보며 ‘할배들도 의외로 우리랑 크게 다르지 않구나’라고 생각하다가 ‘그게 왜 의외지?’라는 점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어린 우리에게나 근엄하고 어려운 어르신들이지, 그분들이라고 평생 함께한 친구들을 부르는 별명 하나쯤 없을 리 없고, 여행 전날 흥분하면 안된다는 법도 없지 않나. 그분들의 일상과 희로애락을 그려보지 못한 내 상상력이 가난한 것일 뿐 의외일 것 하나 없다 생각하니, 문득 나를 화석 보듯 바라보던 스무살 후배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울컥. 이놈들아, 나도 너희랑 크게 다를 거 없단 말이다.
사실 <꽃보다 할배>가 노리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젊은이들의 전유물인 ‘리얼 버라이어티’와 ‘배낭여행’이란 키워드 앞에 ‘할배’라는 주어를 대입했을 때 생기는 의외성 말이다. 그 연세에도 <물랑루즈> 공연은 꼭 보겠노라며 제작진에 티켓을 사달라고 요구하는 신구 선생의 간절한 눈빛이나, 황금빛 페디큐어를 바른 발톱이 돋보이는 박근형 선생의 패션감각 같은 대목들은 ‘어르신들이라면 으레 그럴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사정없이 깨부순다. 비록 파리에서의 첫 아침을 수놓는 기상송이 뽕짝이라는 건 젊은 여행객들의 모습과는 다소 다르지만. 어쩌면 이런 ‘의외’의 즐거움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오해 탓인지도 모른다. 어리고 젊은 날들엔 총천연색이던 감정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무채색이 될 것이라는 생각,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게 시들해지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들. 그러니 나에겐 당연한 행동과 감정들을 어르신들도 비슷하게 경험한다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나이 먹는다고 사람에게서 오욕칠정이 싹 씻겨 나갈 리 만무한데 말이지.
백일섭 선생이 그랬던가. 처음엔 지루한 듯 했는데 돌아올 때쯤 되니 벌써 열흘이 다 됐나 싶었다고. <꽃보다 할배>도 그랬으면 좋겠다. 처음엔 신기하고 의외인 듯했던 것들이, 여정이 끝날 때쯤엔 나이와 무관하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물론 내 후배들은 하필이면 할배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며 동질감을 느꼈다고 나를 또 한참 놀려먹겠지만.
BEST EPISODE
2화-캐릭터 탐색전
이제 2화까지 방영된 <꽃보다 할배> 중 굳이 한편을 뽑자면,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는 2화를 추천한다. 일행이 따라오든 말든 앞만 보고 가는 이순재, 발군의 애교와 능숙한 화술로 멤버들을 다독이는 신구, 새벽같이 일어나 한국의 아내에게 전화를 하는 로맨티스트 박근형, 오로지 숙소로 돌아가고픈 백일섭,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한 짐꾼 이서진의 캐릭터가 알차게 담겨 있다.